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매달 마지막주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의 영화 이야기를 전합니다.
가을입니다.
여름이 무더워 더 기다린 가을입니다.
정취를 맘껏 느끼지도 못했는데 금세 가 버리면 어쩌나 걱정인 가을입니다.
다가올 겨울 맹렬한 추위를 예고하는 서늘한 아침 기온에 돌연 섬뜩해지기도 하는 가을입니다.
'생강'이 이번 레터에서 "올가을을 한편으로 따뜻하게, 한편으로 스산하게 만들어 줄 폴 토머스 앤더슨의 사랑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자가 함께 읽어 볼 희곡을 추천합니다.
*이 글은 폴 토마스 앤더슨, <펀치 드렁크 러브>, <팬텀 스레드>, <리코리쉬 피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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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이 길고 덥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걷기 좋은 계절, 자전거 타기 좋은 계절, 곁에 누군가 있다면 더 좋을 계절. 딱히 계절을 타는 편은 아니지만, 가을에 사랑 이야기가 떠오르는 건 필연적이다. 주제를 고민하다 올가을을 한편으로 따뜻하게, 한편으로 스산하게 만들어 줄 폴 토머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이하 PTA)의 사랑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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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비행기를 탔다. 항공사가 제공하는 영화 목록을 보다가 <펀치 드렁크 러브>(2002)가 눈에 들어왔다. 살면서 비행기를 단 한 번도 탄 적 없는 한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푸딩 포장지의 마일리지 쿠폰을 모아 하와이로 향하는 이야기. 비행기를 타고 보기에 이보다 좋은 영화가 있을까. 단, 너무 웃다가 옆 사람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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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만 일곱을 둔 배리 이건(애덤 샌들러)는 누나들에게 매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며 산다. 누나의 생일 파티에서 폭발한 배리는 집 유리창을 모두 부숴 버리고 만다. 의사인 매형에게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털어놓지만 “배리, 난 치과 의사야”라는 답을 들을 뿐이다. 비행 마일리지를 주는 푸딩을 잔뜩 모으고, 길거리에 버려진 풍금을 사무실에 들여 놓는 이 괴짜는 마음을 털어놓을 곳을 찾고 찾다 ‘폰팅’을 하게 된다. 단지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려던 의도와 달리 수화기 너머 여인은 이 통화를 빌미로 배리에게 돈을 갈취하려 든다. 혼란스러운 와중, 배리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동생 엘리자베스의 회사 동료 레나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솔직 대담하게 말이다. 레나는 엘리자베스의 중개를 무시하고 배리에게 “나랑 저녁 먹을래요?”라고 묻는다. 레나의 솔직함에 배리도 천천히 솔직해지는 법을 배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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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에서 사용하는 ‘펀치 드렁크(punck-drunk)’라는 표현이 있다. 머리에 반복되는 타격으로 어지럽거나 혼란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제목은 ‘여러 대 맞은 것 같은 사랑’이라는 뜻인데, 레나에게 빠진 배리의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EXIT 표시로 가득 찬 미로 같은 레나의 아파트, 배리의 과장된 액션, 필름 촬영을 활용한 렌즈 플레어, 흩어졌다 합쳐지는 카메라 초점 등은 영화의 ‘펀치 드렁크’한 순간들을 잘 보여 준다. 배리가 레나와 하와이 여행을 다녀와 자신을 협박하던 불량배를 흠씬 두들겨 패는 순간, 우리는 그 무엇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목격한다. 그제야 배리는 레나에게 ‘폰팅’ 이야기를 포함해 숨겨 왔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나의 연인이 나에게 솔직하다면 나도 연인에게 솔직할 것. 이 ‘등가 교환’이야말로 <펀치 드렁크 러브>식 사랑의 교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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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적이고 과격하기까지 한 <펀치 드렁크 러브>의 플롯은 PTA식 사랑의 정수를 보여 준다. 이후경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PTA식 사랑은 상대에게 “내 모든 걸 당신에게 줄게요. 당신을 내게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PTA는 말한다. 사랑 앞에는 장애물이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에 선도 악도 없어야 한다. 사랑에는 오직 서로 주고 빼앗는 정치만이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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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A 연출의 핵심은 이런 정치적 사랑을 더욱 뾰족하고 섬세하게 가공하는 능력에 있다. 혹시 <펀치 드렁크 러브>의 어딘가 나사 빠진 듯한 주인공들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면 PTA의 최신작 <리코리쉬 피자>(2022)를 보길 권한다. 이들마저 사랑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일단 PTA의 세계관에 들어온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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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1970년대의 복고풍 배경이 스크린을 휘감는다. 물론 이 영화는 시대극이지만 PTA가 1970년대로부터 취한 것은 당시의 주류 문화나 역사가 아니다. PTA에게 중요한 것은 너저분하고 시끌벅적한 뒷골목의 분위기, 그리고 그것을 돌파하는 사랑의 이미지뿐이다(밝혔듯 이 글에서 ‘사랑’은 ‘정치’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영화의 두 주인공 개리(쿠퍼 호프먼)와 알라나(알라나 하임)는 서로의 사회적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개리는 ‘어리다’. 알라나는 ‘여성’이다. 영화는 서로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두 사람의 싸움을 조명함으로써 시대를 관통하는 대신 시대의 뒤안길에 주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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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리와 알라나는 스스로 마이너리티를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메이저로 향하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택한 사랑법, 즉 자기 파괴적 사랑은 두 사람을 1970년대의 한복판이 아닌 구석 자리로 향하게 만든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고 하던가, 서로 죽일 듯 싸우던 두 사람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든 간에, 그들의 사랑은 위계가 아닌 수평 구도의 회복으로 마무리된다. 비록 <펀치 드렁크 러브>보다는 많이 돌아갔지만, 이 사랑의 결말 역시 해피 엔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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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개리와 알라나의 사랑까지 받아들였다면, 다음으로는 PTA식 사랑의 극한, <팬텀 스레드>(2017)을 보길 권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사랑이 상호 솔직해지는 과정이고, <리코리쉬 피자>의 사랑이 서로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기 위한 과정이라면 <팬텀 스레드>의 사랑은 서로를 짓누르다 못해 죽여야 성립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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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의 계단을 타고 흐르는 영화의 수직 구도처럼 레이놀즈(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알마(빅키 크리엡스)를 만나 점점 신체 통제권을 잃어 간다. 영화를 보면 이해하겠지만, 이 과정은 무척 관능적으로 그려진다(PTA가 그려 낸 이 관능에 여성주의적 해석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이 <리코리쉬 피자>에서 서로의 약점을 공략하는 두 주인공에게서 발생하는 정치 역학과 유사한 무엇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사랑과 정치를 동의어로 사용하는 PTA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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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PTA식 사랑 이야기가 ‘사랑’ 개념의 본질을 꿰뚫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문자화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펀치 드렁크 러브>가 따스하다면, <리코리쉬 피자>가 따스하면서 스산하다면, <팬텀 스레드>는 진정으로 스산하다. 마치 가을이 겨울을 맞이하는 것만 같다. 하나로 합쳐졌다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죽이는 사랑. 세 영화의 스틸 컷을 보면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자. 주인공들의 거리에 주목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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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 <펀치 드렁크 러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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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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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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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희곡의 단골 주제입니다. 그중에는 사랑의 정치적 속성을 보여 주는 것도 있습니다. 스트린드베리의 <율리에 아씨>가 대표적입니다.
율리에는 요즘말로 금쪽이입니다. 신경질적이고 안하무인이죠.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결혼 혐오자 어머니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최근 파혼을 겪고 그 충격인지 성하지절 전야에 아버지를 따라 친척 집을 방문하는 대신 혼자 저택에 남습니다.
하인들과 몸을 맞댄 채 왈츠를 추는 율리에를 두고 하녀들 사이에 뒷말이 생깁니다. 특히 크리스틴의 질투가 대단합니다. ‘썸’을 타고 있는 하인 얀이 율리에 아씨의 새로운 표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리에는 귀족 신분을 내세워 얀을 무릎 꿇립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빈 저택에서 성하지절 밤을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밤을 기점으로 둘 사이 위계는 역전됩니다. 얀 위에 군림하던 율리에는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자책감에 한없이 움츠러듭니다. 반면 율리에의 약점을 쥔 얀은 그녀의 심리를 지배하기에 이릅니다.
네, 사랑은 정치입니다. 불균형한 권력 관계를 전제로 서로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는. 그런데 연인 사이 위계를 결정짓는 건 마음의 크기만은 아닌 듯합니다. 연인을 둘러싼 여러 상황과 사정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결과일 겁니다. 율리에와 얀처럼요.
승기를 잡은 얀은 이제 율리에에게 무엇을 요구할까요? 뭐가 됐든 사랑의 정치 게임에서 한쪽이 승리했다면 그 결말이 파국이고 비극일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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