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원하는 영화 그리고 연극 🎡🎭 매달 마지막주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의 영화 이야기를 전합니다.
삶은 고(苦)라더니, 하루 무사히 넘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쓰디쓴 나날을 보내야 하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자주 음악이고 영화고 연극이고 문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자주 땀을 식혀 주는 바람, 만두 찔 때 피어오르는 훈김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나를 구원한 건 “면발의 익힘 정도”가 딱 알맞았던 육개장 사발면이었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과 미야케 쇼, <새벽의 모든>을 통해 매체와 구원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자가 함께 읽어 볼 희곡을 추천합니다.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
|
2024년, 21세기 들어 유례없는 극장가 고전 영화 열풍이다. 오즈 야스지로, 에드워드 양,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20세기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 시네마테크라는 울타리를 뚫고 멀티플렉스관에 상륙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한 공간에서 1986년의 이미지와 2024년의 이미지를 겹쳐 놓고 사유하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고 있다. 오늘 소개할 두 편의 영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과 미야케 쇼의 <새벽의 모든>(2024) 역시 겹쳐 놓고 보기 좋은 테마를 지녔다. 바로 ‘구원’이다. |
|
|
두 영화의 테마가 ‘구원’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희생>은 알렉산더가 체험하는 제3차 세계 대전이라는 공포로부터, <새벽의 모든>은 후지사와의 월경전증후군(PMS)과 야마조에의 공황장애로부터 인물들을 구원한다. 두 영화가 취하는 구원의 방법과 규모는 크게 다르다. <희생>의 전 지구적 재난과 <새벽의 모든>의 개인적 재난은 영화 양상 자체를 바꿔 버린다. 나는 이것이 20세기적 사유와 21세기적 사유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매체 차이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희생>의 전령인 우체부와 <새벽의 모든>의 전령인 노트북, 스마트폰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희생>에서 인물들이 정보를 획득하는 아날로그 방식(자전거, 우체부의 말,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인물 사이 육체적 거리를 좁힌다. 이전 회사 동료와 줌(ZOOM)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야마조에의 정보 획득 방식을 생각하면 차이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말이다. |
|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중에서. 인물들은 알렉산더의 집에서 연극 무대와도 같은 구도를 형성한다. |
|
|
<희생>의 주 무대는 알렉산더의 집이다. 여기서 ‘무대’라는 말은 은유가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알렉산더의 집에서 마치 ‘연극’을 하듯 움직이고, 스벤 닉비스트*의 카메라 역시 공간을 비스듬히 찍어 공간감을 주는 대신 마치 연극 무대와 관객의 관계 구도와 같은 수평의 화면을 만든다. 알렉산더의 집 외에도 바닷가의 죽은 나무, 마리아의 집이 중요 장소로 등장하지만 이 영화에서 장소의 변경은 일종의 ‘고행’으로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순간이 ‘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반복하고 있는 <희생>이 ‘극적’이라는 말이 “(1) 극의 특성을 띤 것”, “(2) 극을 보는 것처럼 큰 긴장이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의미하는 이유다.
<희생>은 말한다. “만남은 귀하다”고. 그래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감동적이다. 알렉산더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신에게 “내 모든 걸 바칠 테니 전쟁이 벌어지기 전 평화롭던 그때로 되돌려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장면은 슬프다. 가장 아름답고 불경한 장면인 알렉산더와 마리아의 동침은 강렬하고 신비롭다. 모든 것이 전쟁 전으로 돌아오자 알렉산더가 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장면을 보는 것은 감동적이다. 한 인간의 희생이라는 거룩한 이야기에 맞는 거대한 연출. 그것은 인물과 관객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곧 관객과 인물의 ‘동화(同化)’이고, ‘연극으로서 영화’이자 ‘연극적 구원’의 한 방식이다.
__
*스벤 닉비스트 : <희생>의 촬영 감독.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대부분을 촬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
|
|
미야케 쇼, <새벽의 모든> 중에서. 야마조에와 후지사와가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눈다. 이런 숏은 영화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
|
|
반면 <새벽의 모든>은 ‘극적’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화다. 미야케는 PMS와 공황장애라는 설정이 만들 수 있는 스펙터클에 관심이 없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의 관계에 ‘로맨스’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단지 ‘구리타과학’이라는 업무 공간의 일상을 통해 리듬을 구축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항상 인물과 거리를 유지한다. 두 사람이 터널을 지날 때도(후지사와는 야마조에의 뒤를 따라간다), 야마조에가 후지사와의 휴대폰을 가져다줄 때도(야마조에는 집 앞 문고리에 후지사와의 짐을 놓고 떠난다) 그렇다. 유독 자주 등장하는 두 사람이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장면은 인물 간 거리를 유지하려는 미야케의 노력을 잘 보여 준다. 미야케가 직접 언급했듯 이 영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이들의 이야기”(≪FILO≫ 40호, “우연을 구축해 우연을 기다리다” 중에서)다.
<새벽의 모든>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서로의 영역에 깊게 침투하지 않는다. 단지 서로가 각자 홀로 서 있을 수 있도록 먼발치에서 지탱해 줄 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치유 모임, 직원들의 아침 체조와 같은 일상의 조각들은 서로가 어느 날 곁에 없더라도 내 몸을 지나치는 제스처, 하나의 흔적으로서 남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이 확신을 엮어 내는 것이 영화 속 영화인 청소년들의 ‘구리타과학 관찰 다큐멘터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플라네타리움 해설 신이다. 대형 텐트 안에서 인공 별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마치 그 별들처럼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게 될 것이다. <새벽의 모든>이 만드는 구원은 이처럼 큰 사건이 아니라 인물들의 작은 제스처에서 비롯한다. |
|
|
두 영화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두 영화가 ‘구원’을 다루는 방식을 논한 것이 아니다. 소통 방식의 변화가 구원의 형태를 점차 세속화, 일상화하고 있다. 이것이 <희생>의 소통 방식이 오늘날 무의미하다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21세기에 <희생>과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고난은 여러 방식으로 닥쳐오고, 인간에게 구원은 필요하다. 누군가는 과거의 숭고한 이미지로부터, 누군가는 현재의 세속적 이미지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고전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오늘날과의 차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의미를 남기는 근원적 지표들일 것이다.
매체와 구원의 관계를 다루고 싶었지만, 사례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직접 영화를 보며 인물들의 소통 방식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물론 <희생>과 <새벽의 모든>은 한 사례에 불과하다. 고전 개봉작이 몰려오는 지금, 당신을 구원할 이미지가 과연 무엇일지, 여러 시대의 영화를 겹쳐 보며 발견하기를 바란다. |
|
|
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
|
영화로 매체와 구원의 관계를 짚어 주셨으니, ‘구원’의 정의에 집중해 희곡 한 편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사전에 ‘구원’을 찾아보니 뜻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다른 하나는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입니다. 전자는 세속, 후자는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잘못된 태어난 자를 위한 달>은 오닐의 마지막 희곡입니다. 주제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대상은 평생 불운한 가정사와 동생에 대한 자격지심에 시달리다 알코올중독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제임스 오닐 2세의 분신 ‘타이론’입니다. 네, 오닐의 친형입니다.
<밤으로의 긴 여로> 속편이라 할 이 작품에서 타이론은 전작의 주정뱅이 이미지를 벗습니다. 스스로를 지옥에 가두고 천형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형을 오닐은 늦게나마 구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무엇으로 그를 구원할까요?
거구에 괴력을 지녀 어지간한 남성은 힘으로 제압해 버리는, 하지만 내면은 한없이 여리고 섬세한 조시입니다. ‘타이론’은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짓눌러 왔던 비밀을 털어놓고 축 늘어집니다. 조시는 타이론을 무릎 위에 놓고 온밤을 보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피에타>의 이미지가 포개집니다. 오닐의 ‘구원’은 극적이면서 영화적이고,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이며, 종교적인 동시에 세속적입니다. |
|
|
피에타(Pietà)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로 기독교 예술의 주제 중 하나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떠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것을 말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작품이 특히 유명하다. |
|
|
혐관에서 시작해 쌍방 구원으로 끝나는 서사는 언제나 인기입니다. 이 서사에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물의 (내적) 변화입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할 만한 기적입니다. 똑같이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누군가를 구한다”는 뜻을 가졌어도 ‘구원’이 ‘구조’나 ‘구출’보다 숭고하게 다가오는 이유일 겁니다.
오닐의 연민과 사랑이 죽은 형을 구원으로 이끌었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