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호러 영화, 호러 같은 역사에 대해...😱 매달 마지막주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의 영화 이야기를 전합니다.
더울 때 호러, 공포 영화를 보는 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체온을 떨어트려 주기 때문입니다.
처서가 지났지만 아직 한낮 더위의 기세는 맹렬합니다.
호러와 호러 영화에 대해 다뤄 봅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자가 함께 읽어 볼 희곡을 추천합니다.
*이 글은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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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야쿠쇼 코지 주연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개봉에 맞춰 그의 젊은 시절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걸작 <큐어>(1997)가 재개봉했다. <큐어>는 장르 영화 안에서 기괴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구로사와 특유의 능력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영화의 전형적 서사를 따라가는 이 영화는 ‘최면’의 이미지를 영화 속 인물뿐 아니라 관객의 관람 경험 안에 침투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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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목 아래를 X자로 그어 사람을 죽이는 살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다. 특이한 점은 범인이 모두 다르다는 점, 범인들이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만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형사 타카베(야쿠쇼 코지)는 이 사건의 배후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수사에 나선다. 기억을 잃은 남자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가 도쿄 인근을 떠돈다. 이 남자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에게 말을 건 사람에게 라이터 불빛을 겨눈 채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다음 날, 어김없이 말을 건 사람은 살인을 저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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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없는 듯 교차 편집되던 두 이야기는 타카베가 한 병원에서 마미야를 발견하면서 하나로 합쳐진다. 마미야를 추궁하던 타카베는 그가 최면 암시를 통해 살인 교사를 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고, 마미야는 여느 때와 같이 타카베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라고 속삭인다. 이미 마미야를 의심하고 있던 타카베는 어떻게든 저항하지만 자살한 아내의 환영을 보는 등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인다. 이 최면에 빠진 시퀀스가 관객에게 어떠한 암시도 없이 등장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관객은 그 어떤 이미지도 신뢰하지 않거나, 마미야의 최면에 빠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다. 영화를 거부하거나, 카메라를 따라 타카베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이때부터 영화의 숏-역숏 관계는 ‘마미야-타카베’의 구도에서 ‘마미야(영화)-타카베(관객)’로 확장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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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마미야)는 당신이 타카베가 되기를 택한 순간 무서운 제안을 해 온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하다며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는 것이다. 당연히 분노한 타카베(관객)는 마미야를 거부하고 끝내 마미야를 쏴 죽이고 만다. 영화가 만든 세계관, 즉 ‘모든 이는 살의를 품고 있다’를 거부한 것이다. 이로써 악의 굴레는 끊어지게 된 것일까? 여기서 타카베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사쿠마의 “최면 암시에 걸리더라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윤리 의식이 있다면 사람을 죽일 수 없다”라는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을 한 후 마미야를 만나 최면 암시에 빠진 사쿠마는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팔에 수갑을 채운 채 자신을 죽인다. 사쿠마의 윤리 의식은 타인을 향하긴 했으나 자신을 향하지는 못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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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 <큐어> 중에서. 마미야를 만난 사쿠마의 집에 X자 표식이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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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타카베의 미래는 어떨까? 타카베는 살인으로 세계의 악을 처단하고자 했다. 하지만 타카베의 살인이 최면 암시를 당한 다른 이들과 달리 정당하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 타카베는 ‘마미야가 최면 암시를 통해 살인 교사를 했다’는 진실에 닿은 순간, 마미야에게 고통을 털어놓은 순간 이미 이 영화의 세계관을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의 마지막, 우리는 타카베가 마미야와 마찬가지로 살인 교사를 집행하는 모습을 본다. 정신 병동에서 아내는 목에 X자 상처를 입은 채 죽고, 식당 점원은 타카베를 마주하곤 칼을 집어 든다. 아무리 괴로움에 몸부림치더라도 이 장면에 우리가 개입할 방법은 없다. 타카베는 특별하지 않고 끔찍하다. 그리고 이건 타카베와 자신을 동일시하던 관객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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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 <큐어> 중에서. 죽은 아내의 환영을 보고 절규하는 타카베. 하지만 영화 마지막을 보고 나면 이 절규는 조금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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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가 말하는 ‘호러 영화’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저는 이런 게 바로 호러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의 공포 또는 ‘아무래도 이 세상은 이제껏 내가 믿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듯하다’고 깨닫는 순간 느끼게 되는 도망칠 데를 잃은 암담한 기분 같은 감정을 그리는 게 호러라고 생각합니다.” _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중에서.
<큐어>는 ‘진실’을 향한 타카베와 마미야 사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영화화는 탐정물이기도, 스릴러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가 탐구하는 진실은 ‘마미야가 최면으로 살인 교사를 했다’라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치유(cure)’가 ‘살인’이라는 끔찍한 진실 혹은 세계관이다. 깜짝 놀랄 장면은 하나도 없지만 <큐어>가 선사하는 공포의 심도가 그 어느 영화보다 깊은 이유다.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암담함. 그 몰이해로부터 벗어날 수조차 없다는 끔찍함이 <큐어>를 호러 영화로 만든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라는 속삭임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 대답은 마미야가 만든 이 끔찍한 세계관 바깥에 놓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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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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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가 말하는 ‘호러’에서 곧바로 예브게니 시바르츠의 희곡 〈드래곤〉을 떠올렸습니다. 불가해한 존재 드래곤과 그가 세운 굳건한 세계의 붕괴를 그린 희곡입니다.
시바르츠는 동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상징과 허를 찌르는 반전을 통해 현실을 풍자한 작가입니다. 〈드래곤〉은 〈벌거벗은 임금님〉, 〈그림자〉에 이어지는 폭군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이에요.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랑슬롯은 원탁의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하고 지혜로운 인물입니다. 무용담도 많습니다. 주로 악당을 물리치고 아름다운 여성을 위기에서 구해 낸다는 스토리죠.
시바르츠가 희곡을 쓸 무렵, 유럽에선 나치즘과 파시즘이 득세하고 제국주의 침탈과 폭압이 세계적 규모에서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그 모든 폐단과 모순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였습니다.
소련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독재자 스탈린의 폭압과 학정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검열은 뭐... 더 말할 것도 없죠.
용이 나오고 양탄자가 하늘을 나는 동화 같은 시바르츠의 희곡은 검열 때문에 20년 넘게 공연되지 못했습니다. 권력이 예술에 검열이라는 칼을 휘두른 역사야말로 간담 서늘해지는 ‘호러’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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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 자네가 그들 영혼을 본다면 끔찍할 거야. 랑셀로 : 아니오. 드래곤 : 당장 도망쳤을걸. 저런 인간들 때문에 죽을 순 없을 테니까. 이봐, 내가 저들을 기형적으로 만들었어. 필요해서 그렇게 만들었지.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이 강해. 사람 몸을 반으로 자르면 곧 죽어 버리고 말지. 하지만 영혼을 반으로 자르면 더 충성스러워지거든. 아니야, 아니야, 이곳 사람들 같은 영혼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이 도시에만 있다니까. 손 없는 영혼, 발 없는 영혼, 귀가 먹은 영혼, 쇠사슬에 묶인 영혼, 밀고자 영혼, 저주받은 영혼. 자네는 왜 시장이 미친 척하는지 알고 있나? 자신에게 영혼이 없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야. 너덜너덜해진 영혼, 뇌물을 좋아하는 영혼, 재만 남은 영혼, 죽은 영혼. 아니야, 아니야. 저 영혼들이 자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게 참 유감스럽군. _〈드래곤〉 67-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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