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언덕>, 가세 료라는 이상한 남자💌
홍상수 영화는 호불호가 극심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맞고 누군가에게는 틀린 모양입니다.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이 <자유의 언덕>을 중심으로 홍상수 영화의 특징을 짚었습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자가 함께 읽어 볼 희곡을 추천합니다.
*이 글은 영화 <자유의 언덕>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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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서른한 번째 장편 영화 <여행자의 필요>(2024)는 <다른 나라에서>(2012), <클레어의 카메라>(2018)에 이어 홍상수와 이자벨 위페르가 만난 세 번째 작품이다. 위페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민 배우다. 그런데 홍상수보다 위페르를 멋지게 담아 내는 프랑스 감독은 드문 듯하다. 홍상수의 연출은 무엇이 다를까? 나는 홍상수가 영화에서 이방인을 내세울 때마다 한국어와 외국어 사이 미묘한 엇갈림에서 발생하는 어떤 ‘마법’을 포착하고 있으며, 그것이 홍상수 영화에서 위페르의 존재를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여행자의 필요>를 보면서 2018년경 <자유의 언덕>(2014)과 <클레어의 카메라>를 보고 썼던 나의 글 한 편이 떠올랐다. 홍상수 영화의 초현실주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초현실주의’는 ‘마법’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이 글은 2018년 ‘생강’의 단상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당시 홍상수의 최신작이었던 <그 후>(2017) 뒤로 홍상수는 열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다. 이 글을 읽고 홍상수의 세계에 관심이 생긴다면, 나와 홍상수의 세계관이 얼마나 다르게 혹은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는지 살펴 주길 바란다. 먼저 <자유의 언덕>과 이 영화의 이방인 가세 료에 대한 글을 공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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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부터 스물한 번째 장편 <그 후>까지 홍상수 영화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남자와 여자의 연애’일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홍상수는 에리크 로메르*와 자주 비교되었다. 주제 면에서 두 감독의 행로가 비슷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둘 다 젠더 권력에서 비롯한 희극적 상황을 자주 연출하며, 트래킹 숏보다는 고정 숏을 사용해 극적 긴장보다 일상성에 집중한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1998)을 제외한 홍상수 영화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지속적이고 단일한 서사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 로메르와 달리 홍상수는 <극장전>(2005)에서 시작된 극단적인 줌-인(zoom-in) 촬영과 꿈 시퀀스, 차이와 반복 테마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자신의 영화 언어를 리얼리즘에서 초현실주의 영역까지 확장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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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로메르(Eric Rohmer, 1920-2010)는 프랑스 영화감독이다. 영화 비평 잡지 '카예 뒤 시네마' 장뤼크 고다르 등과 함께 논객으로 활동했다. 대표작으로 <몽소 빵집의 소녀>(1963), <녹색 광선>(1986) 등이 있다.
홍상수는 '카예 뒤 시네마'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영화' 부문에 가장 호명된 한국 감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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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초기작과 후기작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는 개별 숏의 차이가 아니라 숏과 숏, 신과 신, 시퀀스와 시퀀스의 배치법 차이다. 홍상수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나름의 초현실성을 획득하는데 혹자는 이를 ‘데페이즈망’*에서 출발한 콜라주 기법이라고 표현한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은 주로 주변에 있는 대상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요소들을 작품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일상적인 관계에 놓인 사물과는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초현실주의의 방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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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에서 초현실성의 획득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초현실주의가 “삶과 죽음, 실제와 가상, 과거와 미래, 소통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높고 낮음 등이 더 이상 서로 모순된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 정신의 어떤 지점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초현실주의가 하나의 양태나 형식이 아니라 과정 자체임을 뜻한다.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은 프랑스 시인으로,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며 초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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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루이스 부뉴엘*은 영화사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감독이다. <세브린느>에서 부뉴엘은 주인공의 상상 시퀀스와 현실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는다. 앞서 주어진 숏의 상황과 다른 결과의 숏을 등장시켜 상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절멸의 천사>(1962)에서는 방금 일어난 사건의 숏을 바로 다음 숏에서 그대로 반복해 기이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는 ‘배치’의 비인과성이 낳은 결과다. 또 부뉴엘은 주인공의 꿈이나 상상 시퀀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행위자를 매개로 초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 1900-1983)은 에스파냐 영화감독으로 파리에서 초현실적인 환상과 현실이 융합된 전위 영화를 만들었다. 대표작에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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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뉴엘, <세브린느(Belle de Jour)>(1967)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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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창작 방식은 그가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밝혔듯 루이스 부뉴엘의 영향 아래 있다. <자유의 언덕> 꿈 시퀀스가 띠는 모호함이 그 영향의 대표 사례다. 이러한 초현실성은 초기작에도 물론 존재하지만 분명한 양식으로 드러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 수정>(2000)에서 동일 사건을 다른 시점에서 반복하는 방식이나 <생활의 발견>(2002)에서의 ‘회전문 설화’라는 영화 내 ‘말씀’에 지배당하는 주인공 경수(김상경)를 다루는 방식은 이런 양식을 예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영화의 시퀀스 배치는 하나의 서사를 모호하게 만드는 대신 현실처럼 보이는 인과적 시간을 통해 일관된 서사의 희극적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뉴엘보다는) 로메르 영화들과 더 유사해 보인다. 평론가 장미셸 프로동(Jean-Michel Frodon)은 “홍상수의 영화들은 항상 서사 축을 갖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의 영화들은 우리의 감각, 혹은 감각들의 집합을 생산하고, 이 세계를 조금 다르게 보도록 하는 힘의 감정들을 증류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방인의 등장으로 이러한 초현실성은 더욱 뚜렷해지는데, 영화 <자유의 언덕>과 <클레어의 카메라>의 시퀀스 배치 방식이 어떻게 서사를 변형시키고 새로운 인물상을 창조하는지 살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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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초기작에서 남성은 주로 젠더 권력에서 비롯한 희극적 상황에 처하곤 한다. <오! 수정>의 재훈(정보석)이 수정(이은주)의 처녀막에 집착하는 행위, <생활의 발견>의 경수(김상경)가 선영(추상미)을 스토킹하는 행위, <해변의 여인>(2006)의 중래(김승우)가 문숙(고현정)의 이미지를 선희(송선미)에게 그대로 투사하는 행위의 우스꽝스러움 등. 남성은 여성을 신비화하고, 알 수 없는 여성의 실재를 계속해서 요구한다. 이들은 재현적 사고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전형적 남성이다. 후기작에서는 시퀀스 배치를 통한 서사의 전복으로 남성성 그리고 재현적 사고 자체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종종 등장한다. 시퀀스 배치의 결과로 인물들의 관계와 성격은 완전히 뒤바뀐다. <자유의 언덕>의 모리(가세 료)는 독특한 시퀀스 배치를 통해 권(서영화)과의 특수한 관계 맺기에 성공하며,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의 영수(김주혁)는 호명을 거부하는 민정(이유영) 덕분에 ‘대상화’라는 남성적 욕망에서 탈출한다. 두 영화의 결말이 달라지는 과정에 초현실적 힘이 개입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자유의 언덕>에서 순서가 바뀐 모리의 편지를 읽는 권의 행위, 그리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모든 지인을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대하는 민정의 태도가 그렇다. 홍상수 영화의 이러한 구조적 특징은 자체로 인물의 성격을 구성한다. <자유의 언덕>에 드러난 분열적 시퀀스 배치는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만희(김민희)와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라는 두 여성의 행위 분담으로 대체된다. 이를 통해 홍상수 후기작의 초현실주의적 특성을 남성성 극복, 나아가 여성적 연대의 구성으로 규정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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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언덕>에서 모리는 영선(문소리)과 대화하며 ‘꽃’에 대해 언급한다. 모리는 영선에게 “꽃을 5분 넘게 쳐다볼 수 있으며,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의 몸이 꽃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현상적 몸, 몸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말을 빌리자면, 모리는 꽃에 ‘거주’한다. 이는 제삼자의 객관적 시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모리가 꽃에 어떤 ‘지향성’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홍상수 영화에서 거주와 지향성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까? <자유의 언덕>은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시점 자체가 행위자인 모리의 시점인지, 해석자인 권의 시점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화는 권이 모리의 편지 뭉치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권은 편지 뭉치를 떨어트리는데 그 결과 편지의 순서가 뒤죽박죽되고 만다. 또 권은 실수로 편지 한 장을 계단에 놓고 가는데 그 내용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모리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모리가 누군가와 싸움을 벌이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파악할 수 없으며 결국 영화 전체 서사는 재구성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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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언덕>에는 두 개의 시간 축이 있다. 하나는 개별 시퀀스 내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지속적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 러닝 타임, 즉 시퀀스들의 합이다. 두 번째 시간은 모리의 행적을 흩어진 편지로 파악하는 권(서영화)에 의해 뒤섞여 인과 관계가 불분명하다. 모리의 행적이 권의 상상인지 모리의 상상인지 역시 불분명하다. 각 시퀀스에 포함된 모리의 행적이 편지 내용이라고 하기에 불충분하거나 과도하기 때문이다. 이 불분명함을 해석의 ‘애매함’으로 받아들이고 영화 서사를 권의 상상 혹은 모리의 상상 중 하나로 선택해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가지 분석 모두 결국 인과적으로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리면, 홍상수는 영화를 ‘애매’한 것이 아니라 ‘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권이 편지를 읽는 장면을 시퀀스 사이에 끼워 넣는 것, 비정상적으로 오랜 시간 잠을 자는 모리의 모습을 영화 전체에서 두 번에 걸쳐 보여 주는 것이 모호함을 만드는 대표 사례다.
영화의 마지막, 권과 모리가 만나는 장면에서 권은 모리가 묵는 게스트하우스를 원래 알고 있었다는 듯 찾아간다. 권이 편지를 읽는 시점에서 그곳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전개다. 만약 영화의 줄거리를 이루는 시퀀스들이 권이 편지를 읽고 그려 낸 장면이라면 ‘흩어진 편지’ 모티브가 시퀀스 사이에 들어가선 안 된다. 권이 등장하는 숏들의 시점은 모리를 만나기 전이므로 이러한 상상은 인과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모리가 사랑하며 존경한다고 언급하는 권에게 자신이 영선과 잠자리를 가진 것을 편지로 밝힌다는 것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 반대로 영화가 모리의 상상으로만 구성되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모리의 체험에서 꿈 시퀀스와 현실 시퀀스는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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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자유의 언덕> 장면. 긴 잠에서 깨어난 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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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적 해석의 불가능성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지닌 모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모리가 항상 들고 다니는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은 영화를 모호함으로 읽게 하는 단서가 된다. 모리의 경험으로 구성되는 영화의 세 번째 시퀀스에서 책 내용을 묻는 영선의 질문에 모리는 “과거-현재-미래의 인과적 시간은 허구”라고 대답한다. 이는 북촌에서 모리의 체험 자체가 권의 ‘편지 읽기’와 같이 비인과적인 것임을 증명한다. 영화는 지향적이기 때문에 모호하다. 하지만 모리의 행적을 따라 진행되는 것은 분명하다. 각 시퀀스에 모리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계속 삽입되기 때문이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인물의 내적 심리를 묘사하는 효과를 거둔다. 모리의 심리적 동기가 시퀀스에서 드러난다는 뜻이다. 모리가 화자이기 때문에 가능한데, 행위자와 발화자가 모두 모리라고 해서 영화가 전부 모리 시점에서 서술된 것은 아니다. <자유의 언덕>이 모호하게 다루는 것은 행위자가 아니라 서사가 표현된 방식과 시점이다. <자유의 언덕>은 실재하는 행위자(모리와 권) 없이는 모호함이 획득되지 않는 구조다. 따라서 모리의 행적을 따라가는 각 시퀀스들은 객관적 체험이 아니라 모리의 지향적 체험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권과 조우하는 장면 역시 모리의 지향적 체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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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모리와 권의 행위의 합이 지닌 모호함을 통해 인과적 시간을 돌파한다. 이전 홍상수 영화에서 남성 주인공들이 상대방을 대상화해 사랑에 실패해 왔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것이 홍상수가 모리를 ‘자신의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긍정적 남성상’으로 평가하는 이유일 것이다. 한편으로 모리는 영화가 숏들의 합임과 동시에 배치를 통해 재구성되며 새로운 의미 단위를 만들어 내는 실재임을 증명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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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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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서 초현실주의를 얘기할 때 빠트려선 안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알프레드 자리입니다.
대표작 <위뷔 왕>은 19세기 말 연극 혁신 운동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입니다. 그로부터 다다운동과 초현실주의 경향이 뻗어 나왔다고 보기도 하니까요.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주저 없이 ‘알프레드 자리’를 꼽습니다.
<위뷔 왕>이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알프레드 자리의 고교 시절 물리 교사 에베르 선생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에요. 동급생 샤를 모랭이 ‘폴란드인들’이란 제목으로 구상한 텍스트를 자리가 희곡으로 발전시켜 모랭의 집 헛간에서 인형극으로 공연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연상시키는데, 위뷔 어멈이 위뷔 영감을 부추겨 왕위를 찬탈하고 동료들을 배신하고, 복수에 희생된다는 전체 줄거리가 특히 유사하죠.
주인공 위뷔 영감은 욕심 많고 비열한 인물입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갖은 악행을 일삼죠. 전통적인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어요. 위뷔에 대한 악의적인 묘사, 주인공의 품위를 추악함과 저속함으로 대체하려 한 자리의 의도는 통했습니다. 혹자는 위뷔를 ‘재앙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림은 알프레드 자리가 1896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서 출판된 《위뷔 왕》을 위해 그린 위뷔 왕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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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레터는? 스토리 구성의 뼈대, '프라이타크 피라미드'의 정의와 활용에 대해 알아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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