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계단 연출 이야기👀👀
계단의 사전 정의는 “오르내리기 위해 건축과 비탈에 만든 층층대”입니다.
하지만 층계를 두어 무한히 상하를 나누는 이 구조물은 태생부터 “이동”보다 “상징”을 염두에 둔 발명품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계단을 천상에 이르는 다리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건축, 문학, 연극과 영화에서 “계단”이 그저 “오르내리기 위한 층층대”일 리 없습니다.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에게 영화 속 다양한 계단 연출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자가 함께 읽어 볼 희곡을 추천합니다.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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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자주 주인공이 되는 사물이 있다. 바로 계단이다. 왜 하필 계단일까? 새삼스럽지만 나는 이것은 영화가 ‘운동’을 담는 예술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상승’과 ‘하강’은 인간에게 희귀한 운동 방식이다. 이는 물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마찬가지인데, 바로 이 희귀함 때문에 상승과 하강에는 많은 의미가 새겨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물이 바로 계단인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여러 연출 기법을 통해 계단에 영상 언어의 미학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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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충돌의 계단 영화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계단은 아마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툠킨>(1925) 제4부에 해당하는 ‘오데사의 계단’ 시퀀스일 것이다. 이 시퀀스를 통해 예이젠시테인은 현대 ‘몽타주’ 기법의 거의 모든 가능성을 발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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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포툠킨>의 몽타주. 근경, 원경, 질서, 무질서, 추락, 상승이 뒤섞인 이 시퀀스는 몽타주가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정동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계단이 위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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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은 포툠킨호를 환영하기 위해 오데사 계단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다. 놀란 시민들은 계단 아래로 도망치다 하나둘 쓰러진다. 발아래 밟히는 시체들,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유아차, 절규하는 시민의 얼굴이 빠르게 교차한다. 계단, 사물, 인간은 충돌하며 서로의 의미를 확장한다. ‘충돌 몽타주’의 효과다. ‘오데사의 계단’은 사건의 전경에 머무르게 하는 대신 장면 속 모든 존재들의 정동이 폭발하는 드라마의 장으로 재탄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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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 부재의 계단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계단이 ‘오데사의 계단’이라면, 계단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글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일본 시네필 문화를 진두지휘한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한 오즈 영화 속 ‘계단의 부재’에 대한 글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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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영화는 현존을 부재에 의해 얼마든지 표상하는 기술을 지닌다. (…) 그것은 틀림없지만, 화면에서 계단의 부재는 그 완고하기까지 한 일관성에 의해 바로 부재 그 자체로서 보는 이를 위협한다. _《감독 오즈 야스지로》, 4장 “산다는 것” 중,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윤용순 옮김, 7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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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춘>(1949) 중에서. 오즈의 형식화된 숏들은 주로 인물과 사물을 측면이 아닌 정면으로 제시한다. 의외로 느껴지겠지만, 정면을 찍는 오즈의 카메라는 한 화면에 많은 정보를 드러내는 대신 숨기곤 한다. 계단은 그 대표 사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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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미는 ‘딸의 결혼과 부모와의 이별’이라는 오즈 특유의 소재를 계단의 부재를 통해 새롭게 해석한다. 계단은 의도적으로 화면에서 배제된다. 이 배제는 일본 가옥의 2층(딸의 공간)과 1층(아버지의 공간)을 분리하고, 2층을 ‘공중에 떠 있는 공간’으로 표상하게 만든다. 이 과감한 해석은 오즈 영화 속 이별을 통속적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 양식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 해석은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극단적이므로, 오직 이 해석에만 매달리는 것은 오즈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 아닐 수 있다. 당신이 오즈의 형식에 충분히 익숙해졌을 때, 이 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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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의 계단. 하녀는 왜 계단 위에 거꾸로 쓰러진 채 최후를 맞이해야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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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사에도 빼놓을 수 없는 계단이 있다. 김기영의 <하녀>(1960) 속 계단이다. 오즈가 영화에서 계단을 철저히 숨긴다면, 김기영은 계단을 영화의 주역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계단을 오르내린다는 ‘특권’을 시각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녀>의 배경인 중산층의 양옥에서 2층은 오직 아버지만을 위한 공간이다. 아버지를 제외하면 하녀에게만 2층 출입이 허락된다. 그리고 주인과 하녀라는 계급과 건물의 구조는 모순과 뒤틀린 욕망을 발생시킨다. 그러니 시대를 앞서간 스토리 덕분에(?)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던 이 영화가 계단에 거꾸로 쓰러진 하녀의 시신을 응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사회는 하녀에게 결코 상승을 허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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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영화사의 위대한 계단들을 소개했다면, 최근 관심을 갖기 된 나의 ‘사적 계단’들로 글을 마무리해 보려 한다. 결론 없고 두서없는 감상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먼저 클로드 샤브롤의 <악의 꽃>(2003) 속 계단이다. <악의 꽃>은 삼대에 걸친 한 집안의 ‘근친상간’과 ‘부친살해’라는 ‘악’을 대물림하는 이야기다.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친 프랑수아는 아버지 제라르의 집에 돌아온다. 돌아온 집에서 끝없는 권태감을 느끼던 프랑수아는 린 고모의 별장을 빌려 의붓남매 미셸과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 한편 아내 안느가 시장 선거에 나선 것을 못마땅해하던 제라르는 선거 당일 술에 잔뜩 취해 자신의 서재에서 공부하던 미셸을 겁탈하려 하지만, 미셸이 휘두른 스탠드에 머리를 맞고 목숨을 잃는다. 안느가 사무실에서 개표 결과를 기다리느라 집을 비운 사이, 린은 미셸을 도와 제라르의 시체를 2층 방으로 옮긴다. 저택이 핏빛으로 물든 사이, 안느는 시장에 당선된다. 지지자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온 안느는 1층에서 파티를 벌인다. 그리고 영화는 조금 전까지 린과 미셸이 제라르의 시체를 옮기던 계단에 초점을 고정한 채 막을 내린다.
나는 이 영화에서 계단이 주인공이 되는 장면 세 개에 주목하고 싶다. 첫째는 오프닝 시퀀스의 트래킹 숏, 둘째는 린과 미셸이 제라르의 시체를 계단 위로 옮기는 장면, 셋째는 엔딩 크레딧에 박제된 계단 장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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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의 계단. 이 장면을 기점으로 린의 귀에 들리던 과거의 환청은 멈춘다. 그렇게 ‘악’의 공모는 계단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장면은 앞선 ‘새장’ 숏과의 대조를 통해 의미를 확장하며 관객에게 은밀한 해방감을 제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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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크레딧에 배치된 계단이 영화의 형식, 즉 ‘저택에 새겨진 악의 역사’를 의미화한다면, 린과 미셸이 제라르의 시체를 옮기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계단은 두 사람을 영화의 서사 바깥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안으로 들여놓는다. 또한 이 장면은 관객을 살인이라는 잔혹한 현실에서 유희의 세계로 이동시킨다. 린과 미셸이 계단에서 힘에 부쳐 제라르의 시체를 놓치는 순간 클로즈업되는 두 사람의 얼굴에 피어난 웃음이 이를 증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카메라는 부감 숏을 통해 린과 미셸을 새장 속에 가두는 착시를 만들었다. 하지만 계단 장면은 두 사람이 새장 밖으로의 탈출보다 강렬한 해방감을 공유하게끔 만든다. 이로써 계단에 새겨진 비밀은 린과 미셸의 추억이 되고, 관객들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악’에 공모한다.
하나 더, 홍상수의 <풀잎들>(2018) 속 계단이다. <풀잎들>에는 괴상한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한 여자가 카페 계단을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순수한 상하 운동만이 공간을 가득 메울 즈음, 여자는 희미하게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르내림은 점차 빠른 리듬으로 변주한다. 이 오르내림에는 어떤 맥락도 없다. 김새벽이 연기한 이 인물은 이 장면 전에도, 뒤에도 등장하지만 영화는 그 어디에서도 이 장면을 설명할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이 장면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한데, 이 장면 이전과 이후의 <풀잎들>이 아예 다른 영화로 보일 정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이 장면의 계단을 설명할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장면이 <풀잎들>의 핵심 테마인 ‘감정’에 대한 통찰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영화 속 김민희가 읊조리는 ‘감정 찬가’를 이 계단 위에 붙여 보는 일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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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쉽고, 너무 힘 있고, 너무 귀하고, 너무 싸구려고, 너무 그립다. 그렇다. 지금은.”
_영화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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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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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근방, 어떤 산비탈 아래에서 사흘 동안에 일어난 이야기− 무대는 상하수로 나누인 언덕. 언덕 위는 일제 시대 소개통에 여러 채의 집이 한꺼번에 헐려 나간 넓은 공터. 공터 뒤로는 상수 끝에서부터 하수 끝까지 철망이 둘려 있고, 철망 뒤 저 멀리로는 도심 지대의 높은 건물이 바라보인다. 상수 철망 앞으로 아카시아 나무 두어 주. 밤이면 이 도심 지대의 불빛이 멀리 바라보기에 별같이 찬란하고 아름답다. 언덕 중앙쯤 해서 아래로 오르내리는 비탈길이 하나 있고, 그 옆에는 ‘雞林商事建築用地’라고, 흰 페인트 바탕에다 검정 글씨로 쓴 표목 말뚝이 꽂혀 있다. 하수 모통이에 전선주에는 ‘소변 엄금’ ‘밑에 사람 사오’라고 서투르게 쓴 종이가 붙어 있다. 언덕 아래에는, 비탈길을 사이에 두고, 방공호가 셋이 나란히 뚫려 있다.
_김영수 작, <혈맥>, 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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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혈맥> 첫 장면, 무대 지시입니다. 비탈길을 경계로 위쪽엔 세련된 고층 빌딩이, 아래엔 지하를 겨우 면한 방공호 셋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무대에서 방공호를 차지한 세 가족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비탈의 계단이 이질적인 두 세계를 잇고 있지만,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위로 또 아래로 옮겨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극 말미에 방공호는 어쩐지 처음보다 아래로 더 꺼진 것처럼 보입니다.
2016년 국립극단 기획,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을 통해 <혈맥> 무대가 재현되었습니다. 가파른 비탈, 허름한 계단 아래의 삶이 방공호와 함께 무너져 내립니다. "밑에 사람 사오" 하는 소리도 맥없이 묻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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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의 사전 정의에 형용사 하나를 추가해야겠습니다.
오르내리기 "힘든" 층층대.
그 앞에서 잠시 멈칫할 수밖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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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레터는? 테리 베를리너가 성공적인 연극 제작을 위해 꼭 챙겨야 할 것들을 조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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