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란기 灰欄記
이잠부, 문성재, 중세, 146쪽, 12800원, 979-11-288-3578-0
개요 원대 작가 이잠부의 잡극. 브레히트에 의해 ＜코카서스의 백묵원＞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줄거리 한 아이를 놓고 두 여인이 서로 자신이 친모라고 주장한다. 판관 포증은 석회로 동그라미를 그려 그 안에 아이를 세우게 했다. 아이의 양팔을 잡아당겨 동그라미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려 한 것이다. 모성애를 이용해 주인공의 누명을 벗겨 주고 사건을 해결한다.
등장인물 남 7 / 여 3 / 이웃들과 산파들
배경 마 원외의 집 안팎
장과 막 제4절
공연 시간 1시간 30분
주제어 법정 / 역사적 인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기생이 된 장해당.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갑주 마원외의 마음을 받아들여 기생을 그만두고 그의 첩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습니다.

마원외의 본처 마부인은 이런 장해당을 눈엣가시로 여깁니다. 

어느 날, 장해당에게 오빠 장림이 찾아와 금전을 요구하고 장해당은 가진 것 모두 마원외의 것이라며 오빠의 청을 거절합니다.

장림은 뻔뻔하게도 장해당을 꾸짖으며 화를 내고 이를 본 마부인이 장림에게 베풀라며 장해당을 설득합니다.

장해당은 혈육의 정에 못 이겨 마부인을 믿고 장림에게 장신구들을 주게 됩니다.    

하지만 마원외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부인은 태도를 바꿉니다. 장해당이 외간 남자에게 장신구를 모두 갖다 바쳤다고 거짓말한 겁니다. 마원외는 이를 듣고 분노합니다.

장해당은 왜 마부인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노래합니다. 

<회란기>는 중국 원나라 때 지어진 희곡입니다. 시문과 역사서술을 최고로 치던 중국에서 소설이나 희곡 같은 픽션은 비주류 문학에 속했습니다. 원나라 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원 지배층은 유교 등 한족 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배척했고, 과거제도 폐지했습니다. 사서오경을 연구하고 시문을 지어 관직을 얻었던 문인들에겐 큰 시련이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혹은 가슴속 울분을 풀기 위해 문인들은 희곡과 소설 창작에 몰두합니다. 그런 연유로 <조씨 고아>, <회란기> 같은 잡극과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류가 대부분 이 시기에 지어졌습니다.

이때 지어진 희곡들을 원잡극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인 대사,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가 어우러진 형식입니다. 대사와 노래는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대사가 삽입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사와 노래 이외에 시(詩)도 활용됩니다. 주로 등퇴장하는 인물을 소개할 때, 특별한 상황을 미리 고지할 때 시를 읊습니다. 인물이 등장할 때 읊는 것을 '상장시', 퇴장할 때 읊는 것을 '하장시'라고 합니다. 

잡극에서 음악의 비중은 상당합니다. 각 대목을 '절' 또는 '설자'라 하는데, 서양 연극에서 말하는 막과 장의 개념입니다. 잡극에서는 이를 특별히 '투수'라고도 부릅니다. '투수'는 음악적으로 완결, 독립된 악장을 말합니다. 해당 대목의 줄거리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소곡이라 할 수 있는 '곡패'가 한두 개에서 수십 개까지 연결되어 하나의 '투수'를 구성합니다. 음악 구성에 따라 장면을 나누고 여기에 별도의 제목을 붙인 것을 보면 음악 자체가 극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드라마 <판관 포청천>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시죠.

<회란기>에 나오는 판관 '포증(포 대인)'이 바로 그 포청천입니다. 중국에선 청백리의 대명사로 통하는 인물입니다.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유명합니다.

송사를 처결할 때도 공정했다고 합니다. 치우침 없는 명판결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포증은 이후 중국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사후 지옥 중 다섯 번째 지옥을 주관하는 심판관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관료이기 때문인지 포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문학작품도 많습니다. <포공안>, <포룡도판백가공안>, <용도공안>, <삼협오의>, <칠협오의> 같은 장편 소설이 나왔고 원나라 때 지어진 잡극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포증은 얼굴이 유독 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칭이 포흑자, 포흑탄이었습니다. <판관 포청천>에서 포청천의 얼굴이 무섭도록 검은 것은 이런 역사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회란기>의 모티프가 된 '두 여인의 한 아이 다툼'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잠부는 지혜로운 판관이 논리적으로 사건을 처결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극화했습니다. '데우스엑스마키나'식 결말이 강조되던 다른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아이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어머니의 난감한 분쟁을 중국에선 포증이 해결했지만 서양에선 솔로몬이 해결했습니다. 두 이야기의 유사성 때문인지 <회란기>는 서양에서도 활발히 소개됩니다. 유럽 전역에서 <회란기>를 앞다퉈 번역했는데, 특히 독일의 관심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클라분트가 번안한 <<하얀 동그라미>>(1924)가 베를린에서 공연된 뒤로 1927년 라이프치히, 1953년 슈투트가르트, 1955년 뮌헨에서 독일어판 <회란기>가 소개되었습니다. 브레히트는 <회란기>의 제4절 부분을 서사극  이론에 입각해 재해석한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제목을 풀이하자면 코카서스의 "흰색 분필(백묵)로 그린 동그라미(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최근 극단 마방진이 제작한 연극 <회란기>가 공연되었습니다. 고선웅 연출가가 <조씨 고아-복수의 씨앗>(2015), <낙타상자>(2019)에 이어 세 번째로 올린 중국 고전극입니다. (<<동아일보>> 고선웅 연출가 인터뷰 기사, 2022.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