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르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아시나요? 스페인 민중시인, 내전 중 암살당해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는 작가, 성소수자, 살바도르 달리의 소울메이트, 그리고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과 ≪피의 혼례≫를 쓴 극작가.
로르카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들입니다.
반란군에 총살당한 예술가가 오랜 독재 기간을 거쳐 현대에 이르렀습니다. 그사이에 로르카의 작품과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 다큐, 소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5분에 한 편씩 공연되고 1분에 수천 부씩 팔려나갑니다. 한국 내 스페인 연극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는 것도 로르카입니다.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던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내년 재연이 확정되었습니다.
독재자도 말소하지 못한 정신문화의 꽃이 민주와 자유의 시대에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었습니다. 진짜 로르카를 찾아나선 연구자 마리아 델가도(Maria M. Delgado)의 보고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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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죽음은 1936년 7월 17일 프랑코 장군이 민주적으로 집권한 중도좌파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발발한 스페인 내전과 관련 있다. 로르카는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에 사망했다. 그라나다는 쿠데타 직후 며칠 만에 반군에 함락되었다. 로르카는 우파 시인 루이스 로살레스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로르카의 가족들은 로르카가 그곳에서 전쟁 초기에 진행된 숙청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로르카는 파세오(paseos)라고 알려진 곳에서 총살되었다. 반군은 이곳에서 공화당 동조자로 낙인찍힌 정치범이나 시민들을 새벽녘에 총살하고 시신은 처형장 또는 공동묘지에 버렸다. 로르카는 8월 18일 이른 아침, 알파카르와 비스나르 사이 한 마을에서 교육자 곤살레스, 무정부주의자 프란시스코, 호아킨과 함께 총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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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한 곳에 로르카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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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3일에야 로르카가 암살되었다는 공식 보고가 나왔다. 카데나 SER 라디오 방송국이 입수한 1965년 7월 9일 자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로르카는 “동성애 및 일탈 행위”를 저지른 “사회주의자이자 프리메이슨”으로 “자백 직후 처형되었다”고 되어 있었다. 자세한 자백 내용은 없었다. 이 보고서는 프랑스 히스패닉인 마르셀 오클레어가 파리 주재 스페인 대사관을 통해 로르카의 사망에 대한 정보를 공식 요청한 데 대한 응답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이는 프랑코 정권이 범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조사 결과를 고의적으로 은폐했음을 확인해 준다.
스페인 내전으로 민간인 약 20만 명이 법적 절차 없이 처형되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이를 “스페인 홀로코스트”라 부른다. 5만 명은 공화당이 장악한 구역 내에서 학살되었다. 학살은 주로 도심에서 자행되었다. (중략) 프랑코의 오른팔이었던 에밀리오 몰라에 따르면 군사 쿠데타를 조직한 반군은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지 않고" 박멸하기 위해 테러 캠페인을 벌였다.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숙청하기 위한 캠페인은 단계적으로 실현되었다.
- 로르카와 같은 초법적 처형이 자행되었고,
- 법률 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장교들에 의해 재판이 이루어졌다.
- 과격파(rojos, Reds) 여성들은 강제로 머리를 깎아 전시했다.
- 교도소,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영양실조, 장티푸스, 고문으로 사망했다.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인원을 수용했다. (국제인권위원회는 프랑코 정권이 1940년에 적어도 27만 여 명을 수감했다고 밝혔는데 재판을 기다리는 최소 10만 명의 수감자들은 제외한 숫자였다.)
- 수감자들은 노예 노동(도로 건설, 관개 사업,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랑코의 영묘 건설 등 공공사업)에 투입되었다.
- 과격파의 아이들을 납치해 프랑코 정권 동조자들의 가족에게 입양시켰다. 50년간 아이들 약 3만 명이 납치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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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원들이 총살장으로 끌려 가고 있다. 1936년 총선거에서 인민전선 내각이 성립되자 프랑코 장군이 이에 반하여 군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원조를 받아 정부군에 맞섰다. 영국과 프랑스는 불간섭 정책을 펴며 내전을 외면했다. 내전은 1939년 반군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이후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 최고 지도자로 권력을 행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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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전략적 군사 기지를 스페인에 배치하는 대가로 프랑코 정권에 재정 지원을 시작했다. 스페인 경제 발전에 힘입어 프랑코 정권의 국제적 이미지도 제고되었다. 그 중심에는 관광 산업이 있었다. 스페인은 경이로운 건축물, 이국적인 분위기, 스릴 넘치는 투우, 매력적인 세뇨리타, 정력적인 남성들의 나라로 홍보되었다. 1950년에 100만 명 미만이던 스페인 방문객은 1975년까지 300만 명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1953년에는 프랑코가 로르카 전집 출판을 승인했다. 검열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싼 가죽으로 제본된 책은 불완전하게나마 작가 언어에 대한 비정치적 해석을 촉구했다. 로르카의 유족은 프랑코 정권이 이데올로기 홍보를 위해 로르카의 작품을 무대화하는 것을 경계했다. 프랑코 정권 초기 수십 년간 로르카의 작품이 제한적으로 공연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유족의 이런 경계와 대규모 프로덕션에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정부 태도가 동시에 작용했다.
로르카는 생전에 여성의 주체성, 성적 욕망을 부추기고 스페인 제2공화국의 진보적 의제를 지지하는 극작으로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로르카 사후 그의 작품은 거의 공연되지 못했다. 1945년 마드리드 상업극장에서 ≪피의 혼례≫를 제작하려고 했지만 당국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로르카의 작품은 소규모의 비상업적 공간에서 일회적으로 공연되곤 했다. 1936년에 창작된 그의 마지막 작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스페인에서 1964년에야 처음 상업 공연으로 제작되었다. 같은 해, 정권이 “신뢰하는” 루이스 에스코바르 연출이 ≪예르마≫를 무대에 올렸다. 마드리드 에슬라바 극장 바깥에 경찰이 배치되었다. 1936년 실패한 스페인의 상징으로서 로르카에 대한 프랑코 정권의 불안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로르카의 연극은 스페인 홍보를 위해 새하얀 집, 플라멩코, 부채, 만티야 같은 안달루시아적인 요소들의 특정한 이미지에 고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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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일간지 ≪ABC≫는 로르카의 죽음과 정권이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로르카 사망 3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 기사는 로르카의 사망이 정부 승인 없이 행해진 강도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극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Edgar Neville은 로르카를 “스페인에 국제적 영광을 가져다준” 작품을 쓴, 초당적인 작가라고 추켜세웠다. 1960년대부터 로르카는 그 친족들이 맹렬히 지지하는 조화 담론에 편입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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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1975년 프랑코 사후 수년에 걸쳐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위해 화해의 정치를 고수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포스트 프랑코 시기에 로르카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십 년간 역사가와 정치평론가들은 이 시기를 평화적 권력 이양의 성공적 사례로 평가했다. 프랑코 시대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정치적 결단이 뒤따랐다. “침묵의 협정”이라고도 알려진 “망각의 협정”은 스페인 민주주의를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으로 프랑코 시대의 범죄를 모두 덮어 버렸다. 좌파와 우파 모두 불만족한 협상과 타협 과정이었다. 우파는 36년간 교육과 언론의 체계적인 통제로 획득한 절대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좌파는 당장 독재 정권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박탈하는 대전환을 원했다. 내전 재발이나 독재 정권으로의 회귀에 대한 두려움으로 양자 모두 희생을 감수했다. 1977년 10월 15일 체결된 이 협정으로 전쟁 중 자행된 범죄에 대해 양자 모두 사법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프랑코의 죽음이 프랑코주의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코 정권의 행정 기반이 사법부, 군대, 공직 전반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중략) 불안정한 국가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계몽된 독재자로서 프랑코의 이미지는 제거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양동이와 삽을 들고 해변에서 손주들과 휴가를 보내는 그의 이미지는 1960년대 초 관광 홍보에 사용되었다. 서구에서 그는 히틀러나 스탈린과는 달리 흉악한 범죄에 도취하지 않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스페인은 캄보디아에 이어 두 번째로 데사파레시도가 많은 국가다. 2012년 칠레에 있을 때 나는 산티아고 론드레스 38을 방문했다. 피노체트 치하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수용소로 현재는 96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 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생존자 에르네스토 콜로마는 이렇게 회고한다. “프랑코는 비델라와 피노체트의 모델이었다. 그들은 프랑코를 보며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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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사파레시도(스)[Desaparecido(s)] :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 중남미의 군부 독재 체제에서 불법으로 납치되어 자취를 감춘 사람들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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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는 포스트 프랑코 시대 초창기를 뒷받침한 “망각”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 의제로 문제없이 편입될 로르카를 만든 시기였다. 로르카의 ‘문학적 위대함’을 부각하는 한편 로르카 저작에 대한 새로운 학술서들이 출판되었다.
이 시기에 로르카 문화 상품화는 로르카 생가 박물관(로르카 서거 50주년을 기념해 1986년 개관했다) 같은 그라나다에서 수익성 있는 관광 산업의 시작이 되었다. 밀라노 피콜로 극장과 오데옹 극장 공동 제작으로 1986년, 1989년에 ≪관객≫과 ≪제목 없는 코미디≫가 초연되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감독 Lluis Pasqual이 연출을 맡았다. 그때까지 관객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었다. 이전엔 로르카의 가족들이 이 작품들의 공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성애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Pasqual의 무대화 이후 로르카는 한마디로 세계 시장에서 먹히는 작가가 되었다.
1987년에 스페인 국영 방송은 로르카를 다룬 6부작 미니시리즈를 황금 시간대에 방영했다. 프랑코 시대에 가장 많이 검열에 시달린 영화 제작자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이 이 시리즈를 연출했다. 영국 배우 니컬러스 그레이스가 주연을 맡았다. 이는 로르카를 부분적으로 보편화하는 데 기여했다. 로르카의 안달루시아 억양은 그의 동성애 성향에 대한 언급과 함께 지워졌다. 동성애 성향은 여성성으로 간단히 굴절되었다. 그 결과 로르카는 국민 화합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었다.
카를로스 사우라와 마리오 카뮈가 “국가적”으로 포장한 영화 <보다스 데 상그레>(1981),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1987) 제작에 막대한 국고 보조금이 투자되었다. 로르카의 상속인이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영화 판권을 1200만 파세타에 팔았다는 보도로 로르카 상표의 상업적 가치가 얼마나 치솟았는지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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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카에 대한 (국가주의) 포장은 1990년대에 사회학적 프랑코주의의 유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역사학자들은 “연대책임”이라는 신화에 도전했다. 프랑코 시대 테러 생존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침묵의 문화 속에서 자라났다. 그 손자들은 과거의 억압과 망명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스페인 인구의 45퍼센트가 전쟁도 독재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민주주의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었다. 내전의 참혹함과 그 여파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한밤중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회고록이 작성되었다. 2000년 1월, 실바는 동료 열두 명과 함께 총살되어 버려졌던 할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한 발굴에 착수했다. 레온에 있는 프리아란자 델 비에조 마을의 표식 없는 무덤에서부터 시작했다. 그해 말, 산티아고 마시아스와 실바는 ARMH를 설립했다. 스페인 전역에서 역사 기억 회복을 위한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독재 정권하에 고문당하고 투옥됐던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량 학살 현장을 확인하고 프랑코 시대의 범죄를 국가 차원에서 인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스페인의 학살지를 둘러싸고 건설된 침묵의 벽을 허물기 위함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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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마리아 아즈나르의 지도로 1996-2004년 집권한 우익 PP(People's Party, 인민당)는 진실화해위원회 구성, 공화당 사망자에 대한 배상금 지급, ARMY의 대규모 무덤 발굴에 대한 국가 지원 요청과 관련한 어떠한 논의도 피하려고 했다. 1998년 아즈나르는 로르카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예산으로 6억 페세타(330만 달러)를 배정했다. “로르카의 삶에 대한 국가적 기념”을 통해 망각을 조장하는 데 일조한 정부에 동조한 것이다. 아즈나르는 말했다. “시에는 이념이 없다. 아름다움과 휴머니티가 있다. 그러니 아무도 옛날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하라. 오늘날 스페인은 페데리코라 불린다.” 이런 입장이 유족의 지지를 얻었다. 유족들은 로르카의 동성애 성향과 중도좌파 성향이 “피상적”이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로르카 탄생 100주년을 기념에 국가 지원으로 마드리드 현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로르카 전시회”에서 작가의 호모섹슈얼리티나 정치적 글에 대한 모든 언급들은 간단히 수정되었다. 아즈나르는 “묵은 공포와 원한을 잊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로르카를 초이데올로기 차원에 놓으려 한 그의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로르카 사후 유산을-40만 명이 죽고 50만 명을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내몬-내전으로부터 구출할 수는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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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2005년 사이에 행해진 60건의 발굴 작업에서 500구 이상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민족학자 프란시스코 페란디즈는 “사회적 부검”을 요구했다. 2004년 선거로 아즈나르에 이어 총리가 된 호세 루이 로드리게스 사파테로는 주정부 차원에서 이 요구에 응했고, 프랑코 쿠데타와 독재를 조장하는 모든 상징물과 기념물을 공공 광장과 거리에서 제거하도록 하는 “역사 기억 법”을 도입했다. 1968년부터 1977년 사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다 희생된 사람들의 유족에 대한 혜택을 확대했고 망명자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스페인 국적을 제공했다. 이런 조치들을 두고 PP는 너무 극단적이라고 주장했지만 국제앰네스티와 ARMH는 충분치 않다고 봤다. 1977년 사면법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집단 매장된 사람들의 위치와 신원 확인, 발굴에 대한 국고 지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처형된 시신의 조사, 발굴, 신원 확인 및 전반적인 관리” 책임이 “역사 기억 협회, 피해자의 친족, 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협력하는 전문가들”에게로 이전되었다. 페르난도 페란디즈는 이를 “인권 아웃소싱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이 법안의 한계와 1977년 사면법의 관계가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에 의해 사법 영역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가르손은 프랑코 시대 범죄를 둘러싼 침묵을 묵과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옹호했다. 1998년 런던에서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체포하는 데 성공하고, 2055년 마드리드에서 아르헨티나의 고문에 대한 유죄 판결을 이끌어 낸 뒤 국제적 명성을 얻은 가르손은 2008년 10월 프랑코 시대의 억압을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로 선언하는 사법 칙령을 발표했다. 11만 4266명이 독재에 의해 사라졌다고 밝혔고, 12개가 넘는 역사 기억 협회의 청원에 따라 19개의 집단 학살 현장에 대한 발굴을 지시했다.
국제 인권법에 의거한 가르손의 기소를 스페인 대법원은 기각했다. 1977 사면법과 더불어 스페인 형법상 해당 범죄들의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이유였다. 반면 국제 인권법은 이런 범죄들을 (인권에 대한) “지속적인 침해”로 인정하고 있다. 가르손은 그로부터 4주 뒤 기소를 중지해야 했다. 관할권도 학살지 소재 법원으로 이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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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대표 인권 판사 발타사르 가르손은 프랑코 독재 정권의 희생자 유해 발굴을 촉발한 판결 직후 스페인 대법원에 의해 직권남용 외 세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중 불법 도청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11년간 판사 자격을 박탈당했는데, 그가 프랑코 시대 범죄와 관련해 처벌받은 유일한 개인이라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 ≪서울신문≫의 관련 기사 전문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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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억 법”이 그동안 스페인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해 왔던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위한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로르카 유해 발굴은 로르카 암살을 놓고 만들어진 서사와 증언들을 효과적으로 배제했다. Shoshana Felman에 따르면 “역사적 정확성이 미심쩍거나 진실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이 모두 의심스러울 때 증언이 요구된다”. 미묘한 역사적 서사가 없는 상태에서 스페인의 “진실”은, 버틀러의 말대로 구체적 실천 즉 억압적이고 패권적인 구조를 위협하는 증언과 기억의 복잡한 콜라주를 통해 효과적으로 구축되었다.
프란시스코 캐리언이 이끄는 로르카 유해 발굴 팀은 당시 그라나다의 ARMH 부사장이었던 라파엘 길 브라체로가 제공하는 유일한 역사적 브리핑에 의존하고 있었다. 로르카가 총살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가장 유력한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1980년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참조했을 거라는 증거는 없다. 보고서는 비스나르에서 알파카르로 향하던 중 로르카의 시신을 봤다는 목격자[그라나다 법원 직원, 당시 로르카를 쏜 것으로 알려진 에스쿠아드라 네그라(흑인전대) 대원 여섯 명 중 한 명]가 보내온 증거 사진, 깁슨의 녹음 등 여러 진술과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깁슨의 녹취 자료에 따르면 로르카는 “올리브 나무가 있는 좁은 도랑에 여전히 묻혀 있다”.
푸엔테 그란데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1980년대 중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추모 공원이 건립되었을 때 올리브 나무 근처에서 발견된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부검 등 신원 확인을 위한 조치는 없었다. 이런 사실은 2009년 유해 발굴 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관련된 공식 기록도 없다.
위원회 부회장 에르네스토 몰리나의 주장처럼 1985년 발견된 유골은 공원 분수 아래 묻혔을까? 1986년 사실 은폐에 로르카의 가족이 연루되었을까? (로르카의 조카는 몰리나의 딸의 대부였다.) 프랑코 정권은 암살 48시간 만에 시신을 없애 버림으로써 범죄 책임을 회피하려 했나? 한 농장 노동자가 1950년대 중반, 카스티야가 지정한 장소로부터 반경 10미터 이내 지점에서 유해를 찾았다고 주장했음에도 위원회는 어째서 올리브 나무 주변 지역을 매입하지 않았을까? ≪El Pais≫지에서 Arroyo는 발굴이 부분적으로, 불확실하게 진행됐다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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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Tony Judt가 말했듯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고 편향적”이다. 그러나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것” 역시 Jo Labanyi가 언급했듯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감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사회 구성원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이해해야 한다. 그라나다의 ARMH와 안달루시아 사법부는 유해가 어디 묻혔는지에 대해 이견이 있었음에도 발굴을 시작하기 전 공식적인 조사를 수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굴 작업을 끝마치기 위해 한쪽 주장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를 반박하는 여러 증언들을 외면했다.
당국은 로르카 유족의 청원을 받아들여 발굴 작업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밀 유지 서약을 받아 냈다. 이는 프랑코 시대 범죄에 대한 지난 정권의 침묵을 연상시킬 뿐이다. Georgina Blakeley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역사적 재구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관여 없이 진행된 여러 조사에서 수집된 증언을 반복해서 공개함으로써 스페인 사회에 역사는 문자로든 상징으로든 돌에 새기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기회를 제공했다. 안달루시아 지방 정부가 강요한 침묵은 애매한 과거의 틈을 메울 공간이나 기념이 불완전할 뿐이라는 인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정치적 도구주의, 이념적 분열주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로르카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지의 발굴 문제는 정치적 과도기를 겪고 있는 국가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 준다. 2011년에야 사회주의 정부는 푸엔테 그란데의 학살 지역 발굴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이어진 논의는 그사이 정치적 화해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사회적 화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현재 PP당은 아직도 프랑코의 쿠데타와 독재를 비난하지 않는다. 어니스트 레넌은 “망각이 국가 건설에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Judt가 지적했듯 “국가는 망각하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한다”, 로르카 유해 발굴은 단순히 무덤에 뼈처럼 묻힌 기억을 파내는 일이 아니다. 스페인 역사가 “의도된 망각” 위에 세워졌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헨리 루소에 따르면 “공식적인” 기억의 인허가는 “기념과 무시와 비난이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을 뜻한다. 로르카의 망령은 이 “공적인” 기억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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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카 유해 발굴은 실패했다. 하지만 로르카가 죽은 지 70년이 지났어도 그가 여전히 현대 스페인에서 주요 쟁점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Alan Sinifield는 “당신은 중요하지 않은 일로 싸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로르카의 상징적 지위는 스페인에서 대량 학살 이슈를 중심에 놓았다.
(중략)
스페인 철학자 Reyes Mate는 로르카 암살이 단순히 가족만의 사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국가의 집단적 현재를 형성한 정치적 행위라고 주정한다. 현대의 헌법 질서가 이 정치적 행위의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침묵하는 것 위에 세워진다면 이런 일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데사파레시도의 존재는 “범죄로 얼룩진 과거와 그에 책임 지지 않는 현재”를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유해의 신원 확인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로르카의 망령은 데사파레시도의 숨겨진 시체들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6년 알모도바르는 영화 < 볼버>에서 과도기의 책임과 정의의 필요성을 상기시켰다. 알모도바르는 2009년 “유족들이 그들의 죽음을 계속해서 파헤칠 것”이라고 말했다. 카를로스 카스티야 델 피노는 “누군가가 우리를 기억할 때만 우리는 존재한다”고 말한다. (...) 데리다는 역사의 망령을 억압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며 망령의 역설적인 상태 즉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상태, 살아 있는 존재와 죽은 존재에 대한 인식과 정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과거 망령과 우리의 유산에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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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ro Almodóvar Caballero,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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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스페인 사회가 과거에 자행된 대량 학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유해 발굴 이슈는 언제나 현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역사 기억 법” 제정은 과거사에 침묵함으로써 너무 오랫동안 정의를 외면해 왔던 나라에서 과거사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갈라진 틈에 대해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움직임을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Maria M. Delgado의 <Memory, Silence, and Democracy in Spain: Federico García Lorca, the Spanish Civil War, and the Law of Historical Memory>를 발췌해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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