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요구합니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비평가 El Crítico
후안 마요르가, 김재선, 2012년 발표, ≪비평가/눈송이의 유혹≫에 수록, 162쪽, 14800원
개요 극작가와 비평가의 대결을 통해 작가와 비평가, 연극의 현주소를 알려 주고 각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
줄거리 볼로디아는 여느 때처럼 공연을 보고 돌아와 평론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극작가 스카르파가 찾아온다. 두 사람은 ‘연극은 무엇인가’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펼친다. 등장인물남 2 / 여 1
배경 볼로디아의 서재
장과 막 구분 없음 공연 시간 1시간 30분 주제어 연극을 소재로 한 / 극중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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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볼로디아는 평소처럼 공연을 보고 돌아와 평론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고, 뜻밖의 손님이 찾아옵니다. 볼로디아가 방금 보고 온 작품의 작가 스카르파입니다. 성공한 극작가, 돈이나 명성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세상과 타협할 줄도 아는 스카르파는 10년 전 볼로디아의 평론으로 크게 좌절했습니다. 그때부터 둘은 서로를 의식하고 견제하며 글을 써 왔습니다.
늦은 밤 처음 얼굴을 마주한 극작가와 비평가는 연극에 대해 토론하다 개인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에게 인정받기 위해 한동안 그를 관찰하고 미행하면서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스카르파 혼자 방에 남았을 때 전화벨이 울립니다. 볼로디아가 편집부에 평론을 불러 줘야 하는 시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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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카
안녕하세요. 준비됐으면 시작하지요.
(구겨진 평론을 다시 집어 볼로디아의 의자에 앉는다. 평론의 구겨진 부분을 펴서 읽으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찢어 버리고 즉흥적으로 말한다.)
만약에 우리가 연극에서 틀렸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만약에 우리가 연극에서 하찮게 여기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 남게 될까요?
우리가 연극에서 강하게 요구하는 것을 삶에서는 절대로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연극에 진실을 요구합니다, 모든 진실을요. 따라서 오늘 밤 우리가 본 작품은 우리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다.
(침묵)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스카르파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며 갑시다. 우리의 말들이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스카르파가 펜을 들고, 우리에게 빚진 자신의 재능을 썩히지 말고 작품을 쓰려고 앉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스카르파는 자신의 관점을 교육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수준으로.
스카르파, 가만히 침묵하세요. 모두가 움직일 때는 멈춘 사람만이 제대로 보는 법입니다. 모두가 떠들 때는 침묵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듣는 법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가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려고 하지 마세요.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밖에 머물러야 합니다, 앞서서 가거나 뒤에 있어야 하지요, 한쪽에 기대거나 뛰어넘어야 합니다.
정말로 제대로 보려면 지금 여기, 현재의 흐름 한가운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항상 늦는 법입니다.
현재의 흐름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고독이나 조롱거리와 마주하세요, 그리고 저항하기 위한 눈을 준비하세요.
(전화를 끊는다. 회계장부를 찢고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준비한다. 하지만 그전에 용기를 얻고자 잔을 채우고 단숨에 들이마신다. 그런 다음 쓰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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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마르퀴나 극장(Marquina Theatre) 초연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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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극단 신작로 제작의 <<비평가>>.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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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로디아는 어쩌다 지독한 '연극바보'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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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을 탐구합니다. 억압과 방어기제를 분석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섭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어린 시절 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생식기의 발달 단계를 거치며 주요 성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존재는 부모입니다. 이 관점은 부모와의 애착 형성 과정이 사회적 관계 맺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비평가>>에서 볼로디아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일화를 들려주는 대목입니다.
난 거짓말을 할 줄 모르거든요. 아버지도 언제나 나한테 평가받는 것처럼, 느끼셨어요, 그래서 난 매를 엄청 맞았지요. 어머니가 항상 아버지 앞에서 날 변호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날 환자 취급하셨죠, 손님들이 오면 날 숨기고요. (p.21)
볼로디아가 아버지와 갈등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서로 사이가 좋았을까요?
어느 날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왜 어머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머니에게 키스하느냐고. 날 때리셨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어머니에게 키스하지 않으셨죠. (p.53)
적어도 아이가 보기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성인이 된 볼로디아는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연극을 보거나 서재에서 평론을 쓰는 데 보냅니다. 그가 친구나 연인, 자녀와 함께인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프로이트는 성장 과정에서 무의식이 '우리'라는 개념을 학습한다고 봤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의 보살핌을 통해 나 말고도 나를 위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연히 '우리'라는 개념을 배운다는 거죠. 고독하고 완고한 평론가 볼로디아는 하루아침에 완성된 게 아닐 겁니다. 볼로디아는 언제부터, 어쩌다 연극을 통해서만 세상과 관계 맺게 되었을까요? 볼로디아의 대사 속, 그의 어린 시절에 단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정도언의 <<프로이트의 의자>>, 임승태 평론가의 <'비평가' 정신분석적 해석>을 참고해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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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술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만든다, 무슨 뜻인가? 예술가의 기본 자질은 용기다. 비겁한 사람들이 보고 부끄러워져서 도망치게 만드는 연극을 해야 한다. 예술은 만드는 사람, 감상하는 사람 모두에게 위험해야 한다. 무대 위뿐만 아니라 무대와 객석 사이에도 갈등의 소재를 던져 줘야 한다. 진정한 연극은 관객들 마음에 갈등을 심어 주어야 한다. 관객을 놀라게 해야 한다. 예술은 인생이 황홀과 기쁨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다.
철학이 연극과 어떻게 연결되나? 연극은 철학자가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 앞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연극은 철학처럼 갈등에서 출발해 그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커질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연극은 나와 다른 목소리들을 알아보고 찾아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관객은 언젠가는 연극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거나 상처처럼 그 질문을 계속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열려 있다’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가?연출이나 배우들에게 호의적이어야 한다. 희곡은 다른 사람에게 해석되기 위해, 그리고 무언가로 대치되기 위해 쓰는 것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해석하는 사람이 수정할 게 없도록 쓰려고 노력하지만 내가 쓴 그대로 공연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내 희곡들을 열어 놓으려고 한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긴 모놀로그로 시작하는데 나는 그게 누구의 대사인지 표시하지 않았다. 한 인물의 목소리로 처리하든, 여럿이 나누어 말하든 연출가의 해석과 상상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맨 끝줄 소년>*에서 처음엔 인물의 나이를 구체적으로 지시했지만, 나중엔 그게 오히려 가능성들을 배제한다는 걸 깨달았다. 창작자들에게 자유를 많이 줄수록 작품이 훨씬 좋아진다. 내 희곡을 무대에서 볼 때마다 항상 뭔가를 배운다. 정말 경이로운 경험이다.
힘 있는 문장을 구사한다, 비결이 뭔가? 축구랑 비슷하다. 전략이 필요하다. 나는 동물의 입을 빌린다. <눈송이의 유언>에서 주인공은 몽테뉴 책을 읽고 현학적인 문구를 인용한다. 그 인물이 교수나 학자였다면 그렇게 쓰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죽어 가는 고릴라가 삶과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설정이라면, 이건 유식해 보이기보다 오히려 역설적이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왜 아이들이 연극을 공부하고 만들어야 하나? 연극은 책임감을 가르쳐 준다. 여러 사람들과 작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 안 그러면 모두 망한다. 또 연극을 만들다 보면 다른 사람 입장에 서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게 된다. 엄청난 일이다. 학생 한 명이 불법체류 중인 이민자,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 왕과 거지 역할을 맡는다. 이건 우리 모두가 사람이라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또 연극을 만들다 보면 당신 안에 있는 다른 가능성들을 알게 된다. 학생들이 직접 연극을 쓰고 연출하게 하면 이 모든 교육적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잡지 ≪JOT DOWN≫에 실린 후안 마요르가의 인터뷰. ≪비평가/눈송이의 유언≫(지만지드라마)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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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1장]에서 제2회 희희낭낭 페스티벌 참가자를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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