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날씨, 참 변화무쌍합니다. 무더위에 여러 날 밤잠을 설친 게 얼마 전인데, 요즘은 사나운 빗소리, 천둥소리에 놀라 깨곤 합니다.
이래저래 편치 못한 밤을 보내고,
몽롱한 눈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반가운 편지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독자의 첫 편지입니다. 셰익스피어 섬머 페스티벌의 추억을 소환해 주셨습니다.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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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올리는 이른바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많은 극장들이 야외 무대를 주무대로 선택하기도 하여서 노을이 지고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조명 삼아 극을 진행하기도 하죠. 선선한 여름 바람 안에 하늘과 무대와 배우를 바라보며 관객들은 몇백 년을 흘러 건너온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할 오랜 전설의 극작가의 말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오리건 셰익스피어 페스티벌(Oregon Shakespeare Festival)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오리건 셰익스피어 페스티벌(Oregon Shakespeare Festival)은 1935년에 처음 시작되어 올해 9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있었을 법한 반원 형태의 엘리자베스풍 극장 야외무대를 주무대로 삼아 매년 미국 전역과 세계 37개국에서 찾아드는 관객들을 맞이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로만 구성되었던 초기와는 달리 2025년 시즌에는 셰익스피어의 <당신 뜻대로(As You Like It)>와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를 포함한 다른 고전 작품들과 뮤지컬도 레퍼토리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을 가장 많이 개최하는 미국 이외에도 캐나다, 영국, 독일 등에서 각각 고유한 셰익스피어 축제를 엽니다. 예전부터 전해져 온 음유시인(bard)의 다양한 작품들을 극단 특색에 맞춰 각색 및 재구성하고, 현대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연출이나 무대디자인 등에도 신경 씁니다. 이러한 시도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지만 흔히 '어렵다'고 생각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합니다. 이미 연극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덜 알려진 작가의 숨은 보석 같은 작품들을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재미도 더해 주죠. 교과서로 셰익스피어를 처음 접한 학생부터 희곡을 사랑하는 팬들까지 모두를 무대로 이끌기 위한 라인업을 각 극단은 매년 연구합니다.
특별했던 <로미오와 줄리엣>
그중에서도 필자가 참석했던 페스티벌 가운데 감명 깊었던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서부의 극단 ‘Ophelia's Jump Productions’ 의 2018년 페스티벌 라인업 중 하나였던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우들 중 다수는 청각장애인이었고 많은 대사가 수어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어렸던 저는 그 소식을 듣자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아시다시피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익숙한 언어의 소리로 들어도 쉬이 이해가 되는 문체는 아닙니다. 없던 단어도 창조해 내는, 시인과 같은 은유적 표현을 가득 쓰는 극작가니까요. 익숙한 언어로 들어도 이해 못 할 문장들을 미지의 언어로 경험해야 하다니 그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했고 또 걱정스러웠어요. 그러나 무대가 시작되자 걱정은 사라졌고, 비로소 연극의 절대적 요소는 언어가 아닌 소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청각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한 공간에서 각각 수어와 영어로 소통할 때, 눈을 마주 보고 다양한 감정과 다채로운 표정으로 극을 진행시킬 때 저는 금세 무대에 녹아들었고 작품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완전한 몰입에는 제작사의 배려도 한몫했는데, 작품 속 어려운 표현들을 현대어로 번역한 일종의 작은 사전을 연극 프로그램에 포함해 배부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된 대사는 더 쉽게 이해하고 수어로 된 대사들은 마음으로 깊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Ophelia's Jump Productions. ⓒAmy
모두와 만끽하는 한여름 셰익스피어
이 공연의 또 좋았던 점은 누구나 부담 없이 공연을 찾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공연이 이루어진 극장은 반원형 그리스식 극장으로, 가장 아래 무대가 있고 그 위로 무대를 둘러싼 돌계단, 그리고 그 너머에는 잔디밭이 있는 형태입니다. 관객들은 선호에 따라 돌계단에 앉기도 하고 또는 캠핑 의자나 돗자리를 가져와 잔디밭에 앉기도 합니다. 가족들과 나들이 온 듯 가볍게 간식도 먹으면서 공연을 즐깁니다. 편하게 그 순간을, 그 여름의 순간을 오롯이 즐깁니다.
‘Ophelia's Jump’ 극단의 페스티벌 외에도 작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일반 시민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할 수 있게 기획된 무료 공연, 작품 및 연기에 관한 워크숍이나 관객과의 대화 이벤트들을 동반하는 페스티벌들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와서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말이죠.
Ophelia's Jump Productions. ⓒAmy
고전이 선사하는 위로
이렇듯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이야기이지만 우리 삶에 아직도 아주 가까이 남아 있는 것들을 담기 위한 노력이 각 무대에 별자리처럼 남아 있습니다. 어려운 단어를 이해하기 쉽게 바꾸고, 철 지난 말들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많은 현대 작품들의 원형으로 이해되는 작품들을 그저 고전이나 원작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작품 자체로서, 관객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연극으로서 역할을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그 시도가 어딘가에서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매순간 바뀌는 트렌드와 60초 숏폼 콘텐츠의 시대를 살고 있는 저에게 큰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어디선간 여전히 200년 전의 언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고, 그 언어를 들으러 매년 같은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런 시대를 삽니다. 여름 바람과 별 바다 아래 아름답게 퍼지는 언어의 시대를요.
New Swan Shakespeare Festival. ⓒAmy
에이미 서울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취미는 서점 산책과 좋아하는 공연의 가장 열정적인 관객 되기. 책과 공연예술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얻는 생동적인 추진력으로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