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생각해 봅니다. 나는 누구일까? 나다운 건 뭘까?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있나? . . .
한 달에 이틀은 딸, 일주일에 하루는 정다운 친구, 하루 여덟 시간 꼬박 희곡 편집자로 그때그때 정체를 바꾸어 가며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순간이 모여 일상이 되고 인생이 되는 거라면 나는 차라리 삶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닐까?
고선웅 작·연출가가 연극 <유령>을 통해 질문합니다.
연극 <유령>에 대해
유령? 사전의 첫째 정의는 “죽은 사람의 혼령”입니다. 그러니까 죽고 없는 사람의 존재감이 불가해한 이유로 두드러질 때 쓰는 말입니다. 둘째 정의는 “이름뿐이고 실제는 없는 것”입니다. 존재감이 미약하거나 아예 없을 때도 유령이란 말을 씁니다. 연극 <유령>의 모티프를 처음 들었을 때 살아서는 미약한 존재감 때문에 ‘유령’이었다가 죽어서는 오히려 ‘유령’으로 소환되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게 된 사람들 이야기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실제로 관객은 연극 <유령>에서 어떤 “유령”을 만나게 될까요? “유령”은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작품을 쓰고 연출한 고선웅 단장님께 직접 들어 보았습니다.
(연극 <유령>을 한 줄 질문으로 표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세상을 사는 나는 나인가, 배우인가?"
유령은 아이덴티티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영어로 ‘I’는 나잖아요? 그 ‘I’는 늘 말뚝처럼 어딘가에 존재로서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유령의 인물들은 떠돌고 표류합니다. 실재하지만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삽니다. 죽어서도 그 존재 증명이 어렵기 때문에 떠돌기를 반복합니다. 저는 그네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리고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네 인생도 유령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유령을 위로하는 한편, 우리의 삶도 역할을 선택하여 살아갈 뿐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주장하는 나라는 존재 역시, 허상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창작 아이디어를 극으로 완성하기까지 약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연극 <유령>이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창작 배경이 궁금합니다.
아, 오해가 있으실까 봐 먼저 말씀 드리고 싶어요. 8년 전쯤에 뉴스 기사를 보았고 관심이 깊이 갔습니다. 제 속에서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났어요. 하지만 희곡은 때마침 형편이 잘 맞아 풀리면 몰라도 하루아침에 써지지 않습니다. 숙성기가 필요하지요. 이런저런 시간 동안 잊혔다가 생각났다가 하면서 시간이 갑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열망이 여전히 식지 않고 남아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유령은 저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참에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8년 동안 준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전 각색에 대해
오랜만에 창작극으로 돌아왔지만 <조씨 고아>, <회란기> 그리고 최근의 <퉁소소리>(고소설 <최척전>)까지, 그간 단장님이 보여 준 무대들에서 연상되는 낱말 하나는 “고전”입니다. 고전에 대한 각별한 애정,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격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추 내지는 추리가 가능합니다. 또한 간접적이라서 사유가 가능합니다. 실재하지 않기에 옛날이야기처럼 상상도 자유롭습니다. 연극은 사유와 상상이 가능할 때 볼만해집니다. 컨템퍼러리는 아무래도 직접적이고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유가 있는 고전으로 작업할 때 행복합니다.
고전이라고는 하지만 단장님의 무대에는 지금, 여기의 감각이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어떤 작품에서 영감을 얻는지, 또 각색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지 들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 작품들을 택합니다. 당연히 주제도 있어야 합니다. (각색에 대해) 우선은 말이 되어야겠지요. 어떤 인물들은 설득력이 없고 어떤 사건들은 억지스럽습니다. 개연성을 잘 만들고 이야기의 기복도 역시 즐거워야하겠지요. 주로 그런 데다 초점을 맞춥니다.
연극에 대해
최근 <퉁소소리>로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영화, 드라마 등 영상 매체 중심의 대중 예술에 수여되어 오던 ‘백상예술대상’이 몇 해 전 연극 부문 시상을 부활시켰습니다. 연극은 영화, 드라마와 달리 반복 및 동시 재생이 불가합니다. 기술 복제, 대량 생산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연극은 영화, 드라마와 함께 ‘대중 예술’로 분류되곤 합니다. 연극이 대중 예술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요? 그런 의미에서 ‘연극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연극이 대중 예술인 이유는 무엇보다 유희하는 인간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오락성 때문이 아닐까요? 여기서 말하는 오락은 감정의 격변을 경험케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와 드라마도 그런 충격이 있지만 연극은 관객이 직접 참여하여 간접 체험을 공유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영상 매체는 관객이 없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관객과 함께 만들어집니다.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배우의 연기가 제대로 충족되면서 완성되는 유일한 장르입니다. 연극은 이 과정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게 하고, 참여해서 간접 경험을 하게 하고, 사람으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사유하게 합니다. TV에서 관객이 엔딩을 결정하는 시도도 몇 번 했지만 그러다 말았습니다. 사람이 살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존재인 한, 연극은 꽤 매력적인 장르임에 틀림없습니다. 연극이 없는 세상은 일단 상상이 안 됩니다. 인간이 쾌락이나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한 연극은 쭉 있을 겁니다.
“세상이 무대, 삶이 연극, 인간이 배우”라는 말에 동의한다는 단장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연극을 만드는 창작자의 바람직한 태도에서 삶을 꾸리는 자세를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좋은 선례를 쌓은 선진에게 오랜 경험에서 축적한 철학과 견해를 들어 보는 일은 언제나 의미가 있지요. 창작자가 갖춰야 할 태도와 소양, 연극과 관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조언을 구했습니다.
내가 지워져야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존재를 증명하려고 할 때 표현 예술은 얄팍해지는 것 같아요. 연출도 배우도 스태프도 제작자도 애초의 좋은 생각과 의지, 마음과 뜻만을 향해 나아갈 때 좋은 연극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욕심이 많아지고 자신의 에고에 빠지다 보면 좋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없어져야 비로소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저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나를 지우기가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려고 늘 노력하고 배워 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