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회자정리, 만나면 반드시 헤어집니다. 눈뜨면 새날이고, 그날과 매일 이별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런 날이 옵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하는 노랫말에 코끝 찡해지는 날이. 그러고는 생각합니다. 겨우 “서른 즈음에” 그걸 알아차렸다니.
생강이 이별하는 영화 <해피엔드>를 리뷰합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부가 함께 읽어 볼 희곡으로 <루나사에서 춤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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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여러 맥락을 껴입은 영화다. 청춘, 재난, 차별, 권력, 음악, 정치, 정체성 등 다양한 맥락이 화면에 개입하지만 이미지는 흔들리는 법 없이 단단하다. 그래서 어떤 맥락을 중심으로 보더라도 모순 없이 명쾌하게 해석된다. 이 명쾌함에 힘입어 수식을 활용해 <해피엔드>를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영화의 주요 사건들은 의도적으로 짚지 않았다. 설명보다 느끼는 것이 더 좋을 장면이 많은 영화다. 또 미리 하나 짚자면, 이 글에는 ‘지진’이라는 표현이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감독이 밝혔듯, 이 영화의 제목은 원래 <해피엔드>가 아니라 <지진>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네오 소라, <해피엔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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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 도쿄, 음악에 빠진 다섯 청춘 유타, 코우, 톰, 밍, 아타가 어둠을 가르며 달린다. 릴은 멈추고(프리즈 프레임 숏) 화면엔 “해피엔드”라는 글자가 새겨진다. 하나의 스틸컷에 이보다 강한 캡션이 붙을 수 있을까? 방점은 ‘해피’에 있을까, ‘엔드’에 있을까? 영화가 끝난 뒤, 나는 “해피엔드”를 ‘화양연화’라는 단어에 겹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 두 번 등장하는 프리즈 프레임 숏 때문이다. 오프닝 시퀀스의 프리즈 프레임 숏에 담긴 ‘다섯’은 엔딩 시퀀스의 프리즈 프레임 숏에서 ‘둘’로 바뀐다. 그리고 최후의 육교 프레임은 ‘제로’가 된다. 행복하지만 끝이 있는 시간. 이별할 수밖에 없는 청춘들. <해피엔드>는 ‘뺄셈’하는 영화, 즉 청춘의 ‘이별 방정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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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소라, <해피엔드> 중에서. 질주하는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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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떠나는 이는 톰이다. 영화가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지만, 톰은 재일교포 4세인 코우와 마찬가지로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정체성 문제를 겪는 인물이다. 그만큼 또래에 비해 조숙한 톰에게 코우는 ‘철없는’ 유타와 어른이 돼서도 친구로 지낼 수 있을지 묻는다. 다섯 중 가장 먼저 고등학교 졸업 이후의 삶을 상상한 인물이 톰이기 때문이다. 결국 톰은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톰의 결심을 전해 들은 ‘철없는’ 유타는 말없이 몸짓으로 화를 낸다. 청춘의 끝을 받아들인 톰과 그렇지 못한 유타의 세계가 충돌하는 첫 번째 순간이다. 둘 사이 흐르는 껄끄러운 공기, 마주 보지 못하는 시선. 배경음으로 개그 콤비 아타와 밍의 ‘가짜 더빙’이 깔리지만 이 균열은 유머의 힘으로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1=4, 영화에서 반복되던 지진은 이제 주인공들의 마음을 덮쳐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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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소라, <해피엔드> 중에서. 톰은 가장 먼저 어른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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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떠나는 이는 아타와 밍이다. 중국계 혼혈인 밍은 친구들이 치켜세우던 자신의 중국어 실력이 수준 미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밍을 가장 먼저 위로하는 이는 아타다. 비워진 동아리방을 청소하다 두 사람은 구석에 몰린다. 이 이미지는 텅 빈 방의 여백과 두 사람의 가까운 거리 사이 대조 때문에 무척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졸업식을 마친 귀가길, 육교에서 아타와 밍이 동반 퇴장하는 것은 그래서 어색하지 않다. 둘은 연인이 될까? 가족이 될까? 먼 미래까지 상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네 사람을 덮친 마음의 지진 속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퇴장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들은 동시에 어른이 된다. 4-2=2, 이제 남은 건 코우와 유타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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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소라, <해피엔드> 중에서. 아타와 밍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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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떠나는 이는 코우다. 다섯 중 ‘철없는’ 유타와 가장 가까웠던 코우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후미를 만나면서 유타의 ‘철없음’에 진저리가 나기 시작했다. 코우는 유타를 걱정했다. 유타가 ‘부디’ 어른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유타는 코우를 순수하게 사랑했다. 코우가 ‘무사히’ 어른이 되길 바랐다. 유타는 코우와 함께 교장의 차에 저지른 죄를 홀로 뒤집어쓴다. 그 장면 앞에서 코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타는 본인이 치를 대가를 알고 있었을 테다. 그는 더 이상 교복을 입지 못한다. 졸업식, 사복 차림으로 등장한 유타는 아타와 밍을 떠나보내고 코우와 육교를 나란히 걷는다. 이제 떠날 시간, 그들은 알고 있다. 우리가 다시 볼일이 없으리란 걸. 시간이 없다. 하지만 코우는 아직 유타가 대신 뒤집어쓴 죄를 책임지지 못했다. 그 순간 유타가 장난처럼 코우에게 주먹을 지른다.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한 코우에게 웃으며 보내는 복수다. 더 이상 둘에게 남은 빚 같은 건 없다. 그리고 프리즈 프레임. 관객들이 그러하듯, 두 사람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1=1, 이제 코우는 세상이라는 지진과 싸우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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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소라, <해피엔드> 중에서. 마지막 빚을 청산하고 두 사람은 헤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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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떠나는 이는 유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떠나지 않는 자가 유타다. 모두가 어른이 되기 위해 어디론가 나아갔지만, 유타는 순응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남는다. 하지만 친구들보다 늦게 어른이 되는 것은 결코 비극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유타는 다섯 청춘이 보낸 시간을 걱정 없이 가장 순수하고 행복하게 보낸 사람이기도 하니까. 코우가 떠난 육교, 유타는 이전처럼 코우를 붙잡고 “사랑해”라며 질척거리지 않는다, 유타는 코우가 내려간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이제 유타가 돌아갈 곳은 코우가 ‘무의미’하다고 치부한 ‘음악’뿐이다. 유타가 견뎌야 할 이별의 무게는 다섯 중 가장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톰의 미래도, 아타의 미래도, 밍의 미래도, 코우의 미래도 보여 주지 않았지만 유타의 미래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단서를 남겨 주었다. 레코드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유타가 슬픈 음악을 연주하자 점장이 짜증을 내며 신나는 음악을 틀자고 한다. 점장이 고른 것은 유타가 사랑해 마지않는 테크노. 레코드숍은 오프닝 시퀀스의 클럽보다 북적인다. 봐, 세상에 무의미한 일 따윈 없다니까. 1-1=해피엔드, 철없던 소년은 지진 속에서도 행복한 어른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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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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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의 시 <낙화>를 부분 인용하고 있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때를 알기가 어렵고 안다 해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과 참 추잡하게(?) 이별합니다.
아일랜드 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의 <루나사에서 춤을> 결말을 길게 인용합니다. 영화 <해피엔드>처럼 이 희곡의 인물들도 잇달아 이별합니다. 다섯이던 먼디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사연이 마이클의 마지막 독백에서 드러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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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오코너 연출, 매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 <루나사에서 춤을>(1998) 트레일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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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 말씀드린 대로 잭 삼촌은 채 열두 달이 못되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그네스 이모와 로즈 이모도 떠나 갔죠. 이 집 심장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매기 이모가 로즈 이모와 아그네스 이모가 했던 일을 물려받았고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셨죠. 제 어머니는 여생을 편물 공장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내내 그 일을 혐오하셨죠. 그 후 몇 해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케이트 이모는 상점 주인인 오스틴 모건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선 그 많은 활력과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죠. 그리고 제가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전 젊은이의 이기적인 방식대로 기꺼이 그 집을 탈출했습니다. 이렇게 제 마음이 1936년 그해 여름으로 되돌아갈 때면 여러 가지 기억들이 제게 밀려옵니다. 하지만 가장 자주 떠오르는 루나사 때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의 주변에서 나를 매혹하는 건 그것이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억 속에서는 분위기가 실제 사건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모든 것이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환상적인 것이 되죠. 그 기억 속에서, 또한 공기는 1930년대 음악과 함께 향수에 젖어듭니다. 그것은 저 멀리 어디에선가부터 흘러들어오죠− 음악의 신기루− 실제로 들리기도 하고 상상이기도 한 꿈의 음악 말입니다. 그 음악은 그 자체이면서 그것의 메아리이기도 하죠. 소리가 너무나도 매혹적이고 황홀해 오후 내내 마법에 걸려 있기도 하고 넋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참으로 이상한 건 모든 사람들이 타인들과 완전히 유리된 가운데, 그 감미로운 소리 위에 붕 떠다니면서, 리듬을 타며 나른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박자보다는 음악의 분위기에 호응하면서 말이죠. 그런 모습을 떠올리면서 전 춤을 춘다는 건 바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을 뜨면 마법이 깨질까 봐 반쯤 눈을 감고 추는 춤. 마치 언어가 움직임에 굴복해 버린 것 같은− 그리하여 마치 이 예식, 이 말없는 의식이 비로소 말을 건네고,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것을 속삭이고, 다른 어떤 것과 접촉하는 방법이 되어 버리는 그런 춤. 그 마음을 달래 주는 선율과 그 고요한 리듬 속에서 그리고 그 침묵에 사로잡혀 있는 주술적인 움직임 속에서 삶의 가장 소중한 것과 그것의 모든 소망들이 찾아질 것만 같은 그런 춤. 마치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기 때문에 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그런 춤…
_브라이언 프리엘, <루나사에서 춤을>(조태준 역) 170-17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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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의 독백은 '젊은이답게 이기적으로 떠나온' 고향, 가족에 대한 미련 같습니다.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라지만
소매 끝이나마 붙들 미련조차 없는 헤어짐은 어쩐지 서운하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척거려 봅니다.
“가...니, 나의 삼십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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