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에 대해 📽️ 생강의 영화 이야기와 함께 읽어 볼 희곡 소개를 전합니다.
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함께 읽어 볼 희곡으로 윤영선의 <여행>을 추천합니다.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 가는 것”, 사전은 ‘여행’을 그렇게 정의합니다.
그리고 여행의 완성은 일상으로 무사히 복귀하는 것입니다.
생강이 근속 휴가를 떠나기 전 지만지드라마 뉴스레터 팀에 쥐여 준 글입니다.
*이 글은 미겔 고메스, <그랜드 투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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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는 17세기 중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문물을 익히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_위키백과, “그랜드 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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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에 파견된 대영 제국의 공무원 에드워드는 겁이 많다. 결혼을 서두르는 약혼자 몰리가 버마로 찾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급히 국경을 넘어 도망친다. 방콕, 태국, 베트남, 일본, 중국…. 한발 늦게 버마에 도착한 몰리는 사촌 오빠에게 에드워드가 버마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곤 에드워드의 행적을 좇는다. 에드워드는 몰리를 피할 수 있을까? 몰리는 에드워드를 만날 수 있을까?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미리 거대한 스포일러를 할 필요가 있겠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고메스는 에드워드의 여정과 몰리의 여정을 교차 편집하는 대신 에드워드의 여정을 1부로, 몰리의 여정을 2부로 제시한다. 그러니까 영화가 에드워드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순간, 우리는 에드워드와 몰리가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안 채 몰리의 이야기로 진입하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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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고메스, <그랜드 투어> 중에서. 대영 제국 시대에 웬 오토바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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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리 흥을 깨느냐고? 이 영화에서 결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보자. <그랜드 투어>는 극영화인가, 다큐멘터리인가? 당신이 이 영화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장면은 대영 제국 시대를 살아가는 에드워드와 몰리의 시각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랜드 투어>를 이끄는 동력은 ① 21세기 아시아를 담은 푸티지 이미지, 그리고 ② 국적을 넘나드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에드워드와 몰리의 여행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푸티지 이미지들은 에드워드와 몰리의 행적을 설명하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엮여 21세기를 20세기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 낸다. 당신은 21세기를 ‘보지만’ 20세기의 이야기를 ‘듣는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사이의 유비와 차이. 그것이 <그랜드 투어>의 주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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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고메스, <그랜드 투어> 중에서. 열차 탈선으로 에드워드와 몰리는 문명의 바깥에 놓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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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극영화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는 서사의 진행을 위해 편집된다. 하지만 <그랜드 투어>는 마치 이미지와 사운드의 적절한 배치를 위해 서사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인형극, 오토바이, 시장, 열차, 빌딩. 21세기 아시아라는 열차는 에드워드와 몰리라는 과거의 인물을 태운 채 우아하게 전진한다. <그랜드 투어>의 미학적 성취는 에드워드가 탄 방콕행 열차의 탈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탈선은 단순한 지리적 이탈이 아니다. 이것은 ‘그랜드 투어’라는 대명사로부터의 이탈이고, 속도로부터의 이탈이며, 문명으로부터의 이탈이다. 에드워드와 몰리는 도로가 아닌 숲을, 항로가 아닌 강을 건널 운명에 놓였다. 에드워드는 가마꾼을 고용해야 했고, 몰리는 뱃사공을 고용해야 했다. 이 느림으로부터 영화는 서정성을 확보한다. 다른 언어로 펼쳐지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서정시와 같고, 푸티지 이미지는 인상주의 그림과도 같다. 고메스의 말대로 “여자와 남자, 영화의 세계와 우리가 실제 세계라고 부르는 것,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 연속성을 만들어 내려 애쓰는 것”, 그것이 <그랜드 투어>의 리듬이며 미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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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의 여행기는 아편을 태우는 연기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몰리의 여행기가 시작된다. 에드워드를 찾아 떠난 몰리는 중국에서 한 서양인을 강도 살인했다는 네 명의 사형수를 본다. 우리는 그 서양인이 에드워드일 거라고 짐작한다. 곧이어 몰리는 숲속에서 얼어 죽는다. 우리는 그 죽음을 본다. “몰리는 얼어 죽었다”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눈감은 몰리의 모습을 덮으며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갑자기 어디선가 빛이 몰리의 시신을 내리쬔다. 우리는 그것이 촬영 현장의 조명이라는 것을 안다. 몰리는 일어난다. 조금 전까지 몰리를 애도하던 중국인들은 몰리를 부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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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고메스, <그랜드 투어> 중에서. 몰리와 응옥의 행복했던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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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레이션의 종결과 함께 이야기는 ‘컷’ 사인을 맞이했다. 하지만 빛은 끊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영화는 컷 사인과 관계없이 계속된다. 왜냐하면 <그랜드 투어>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랜드 투어>는 에드워드와 몰리라는 배경 음악을 두른 미학적 실험이다. 관객이 보는 것은 ‘살아난’ 몰리가 아니다. ‘몰리’라는 배경 음악이 거둬진 현실이다. 현실은 말한다. 그들의 여행은 ‘픽션’이라고. 아편을 태우는 연기가 에드워드와 몰리의 이야기를 연결해 연속성을 부여한다면, 몰리를 비추는 빛은 분절을 만든다. <그랜드 투어>는 이중의 꿈이다. 에드워드와 몰리의 이야기라는 꿈, 다른 하나는 그 이야기를 담아내는 영화라는 꿈. 그리고 꿈과 꿈 사이에 빛과 연기가 있다. 맨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랜드 투어>는 극영화인가, 다큐멘터리인가? 고메스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영화를 구축했다. 이 질문에 억지로 답하느니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랜드 투어>는 아득하고 희미한 연기 같은 꿈이라고.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고 내리쬐는 빛이 나를 꿈에서 일으켜 세웠다고. 몰리가 그랬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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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소리 사이 연결과 단절을 이야기한 이번 레터에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4월 23일, 시부야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이미지포럼에서 알랭 기로디의 <호수의 이방인>을 봤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프랑스 영화라니, 대사를 이해할 방도가 없다. 하지만 좋았다. 인물들의 대화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미지 자체로 이야기가 완전히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영화는 이야기이기 이전에 이미지니까 말이다. 여러분도 한 번쯤 자막 없이 영화를 감상하는 경험을 가져 보길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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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이미지포럼’의 <호수의 이방인> 티켓. 가격이 사악하다. 1900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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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다이칸야마 츠타야서점에서 구입한 하스미 시게히코의 <<숏이란 무엇인가>>와 왕빙의 스틸컷 모음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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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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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여행>은 동창생들의 좀 특별한 여행기입니다.
후산리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양훈, 대철, 태우, 만식, 상수는 친구 경주가 간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가기 위해 모입니다.
장면은 이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갑니다. 1. 서울역에서 2. 기차 안에서 3. 장례식장에서 4. 화장터에서 5. 버스 안에서 6. 터미널에서
오랜만에 옛 친구들이 모였으니 할 얘기가 얼마나 많을까요. 저마나 치열하게 살아 낸 시간들을 증언하기 바쁩니다.
그러다 마침내 옛 친구의 화장 장면을 보고 난 뒤에는, 그의 치열했던 한 생이 순식간에 한 줌 재로 식는 것을 보고 난 뒤에는, 죽음이 두려운 것임을, 삶이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 한들, 삶과 죽음을 초월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지요. 이들은 다시 치열하고 팍팍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 마주할 일상이 전과 같진 않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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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는 여행의 진짜 의미를 새로운 것을 "보는 것"보다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서 찾았습니다.
여행지에선 모든 게 새롭죠. 보는 것뿐 아니라 먹고 마시고 듣는 것, 풍기는 냄새까지. 모든 걸 만끽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언제나 반복이던 것들 중 어떤 건 새삼스레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마 그 “눈” 때문인가 봅니다.
생강은 여행을 마치고 일주일 만에 무사히 일상으로 복귀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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