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연은 2012년이었습니다. 1891년 뮌헨에서 첫선을 보인 지 120년 만이었습니다.
13년이 흘렀습니다. 박정희 연출과 이혜영 배우가 다시 만났습니다. 2025년 한국에서 재회할 헤다는 13년 전과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요?
박정희 연출님께 들어 봤습니다.
재연 소식 처음 들었을 때부터 머릿속을 떠다닌 "?"가 "!" 되어 마음속에 내려앉았습니다.
(재)국립극단 제공
13년 만의 헤다!
2012년과 2025년, '헤다'는 얼마나 다를까요, 혹은 얼마나 같을까요?
2012년에는 소위 신격화된 헤다, 지배자적인 헤다의 모습을 그렸다면 이번 재연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는 한 인간으로서의 헤다를 보고자 했습니다. 초연에서는 헤다의 핵심 정서가 ‘불안’으로 설정됐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헤다가 가진 ‘공허함’에 눈길이 갔어요. 움직임, 음향 효과 등을 통해 이러한 변형을 연출적으로 보여 줄 생각입니다. 다만 [원작 희곡 속의 ‘헤다’-2012년 초연의 ‘헤다’-2025년 재연의 ‘헤다’] 모두 실존을 위해 삶이라는 진창에서 고군분투하는, 정말 몸부림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 같아요.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은 시대를 건너와도 (변치 않는) 그녀가 가진 본질 같은 것이죠.
(재)국립극단 제공
초연으로부터 13년이 흘렀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재연은 연출님께 어떤 의미였을까요?
초연 때는 사실 공연을 만들기에 급급했는데 이번 재연을 준비하면서 원작자인 입센을 조금 더 가까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고전과 원작 작가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를 더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입센은 인간의 실존적 책임을 강조하는 예술철학관 아래 인간 혁명을 외치는 작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시대는 계속 변화하지만 모순적인 사회상은 그 겉태만 바꿔 가면서 늘 우리 곁에 존재하니까요. 이런 시대적 연속성 위에 고전을 그려 낸다는 것이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관객이 다시 보고 싶은 작품” 국립극단 ‘Pick 시리즈’ 첫 개시작으로 <헤다 가블러>를 재연하게 되면서 관객 중심의 극장과 작품을 표방한다는 데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매우 뜻깊은 마음입니다. 즐거운 부담감이라고 할까요?
이혜영 배우와의 재회!
(재)국립극단 제공
이번 재연 소식은 박정희 연출님과 이혜영 배우님의 재회만으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다시 "이혜영의 헤다"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연 때 이혜영 배우가 제가 어떤 연출가인지 알고 싶다며 계속 만나자고 하더군요. 연출에 대해 궁금해하고, 작품을 진심으로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이혜영 배우는 초연 때도 그랬지만 ‘헤다’라는 인물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직감적으로 인물의 본질, 인물에 대한 이해 자체를 흡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머리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아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점에서 이혜영이 연기하는 ‘헤다’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정갈합니다. 배우가 인물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데코레이션들이 들어가는데 그런 것들이 없어요. 초연 때부터 이혜영이라는 사람이 ‘헤다’ 자체로 보였어요. 현존이 매우 강한 배우입니다.
배우에 대한 연출님의 굳건한 믿음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요?
이혜영 배우는 그 매력을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려워요, 어떤 면에서는 지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동물적이면서 원초적이기도 하거든요. 인물마다, 또 한 인물 내에서도 서로 다른 이미지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연출이 캐릭터에 입힐 수 있는 복잡다단한 레이어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배우입니다. 이러한 배우의 능력에 연출이 믿음을 가지고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도 배우가 캐릭터 분석과 구성에 매우 공을 들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모든 대사 한 줄, 한 줄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찾아 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배우로서 그 시간 동안 더욱 (좋은 의미로) 예민하고 민감해졌구나를 느꼈어요.
달라질 미장센!
(재)국립극단 제공
오늘, 한국에서 헤다와 관객을 잇기 위해 초연 때와 달리한 연출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이 담아내야 할 시대성도 분명히 변화하는 점이 있어요. 지금, 현재 한국 사회를 조금 더 환유하게끔 동시대성을 담아내고자 일부 변형을 가하거나 무게중심을 더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초연 때보다 헤다 주변 인물들의 관계성에 집중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예요. 헤다 주변 인물들도 개개인의 면모를 살펴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을 각각 표출하고 있거든요. 작품이 발 딛고 있는 시대 역시 원작이 가진 19세기 귀족 사회로 특정하지 않고 조금 더 현대적인 자유와 광란의 시대로 옮겨 왔어요. 원작의 배경이 변화가 태동하는 시기이므로 현대사에서 그러한 격정적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를 매칭하고자 했죠. 진보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시대로, 관객이 직접 경험하거나 또는 멀지 않게 감각하는 시대상을 작품 배경으로 설정했습니다. 초연 때는 웅장하고 클래식한 고전의 시대적 배경을 구현한 것과 달리 시대상에 변형을 가미함으로써 올해는 조금 더 세련되고 도취적이며 우아한 미장센을 무대에 펼쳐 놓을 예정입니다.
이번 공연에서 관객은 어떤 질문을 품게 될까요?
무엇이든 관객분들이 느끼는 것이 답이겠지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이 작품이 단순히 수동적 여성상의 억압과 탈출과 같은 고전적인 해석으로만 읽히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 인간으로서 ‘헤다’를 바라봐 주셨으면 합니다. 꼭 공연이 끝나고 질문이 남지 않더라도 ‘헤다’라는 인물을 오늘날의 시점으로 감각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한 수용의 미학을 이루기 위해서는 저희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겠죠!
고전苦戰? 고전古典!
고전을 어렵고 무겁게 받아들이는 독자 관객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무대는 수시로 고전을 소환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고전은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연출님은 '고전의 힘'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빛이 바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이 고전에는 있어요. 시대를 관통하여 현시대가 여전히 공감하고 감동하는 본질을 보유하고 있기에 살아남은 작품들이 바로 고전인 것 같습니다. 만나는 시대와 인간이 다른데도 계속해서 널리 읽히고,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아마도 작품이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신자유주의의 붕괴로 인한 경제 위기, 정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 소외 등 중첩된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삶의 진리’를 구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과거의 박제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대적 의미로 재탄생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재)국립극단 제공
마지막으로!
헤다는 연극사상 가장 극적인 여성 인물로 평가되곤 합니다. 페미니스트의 전형으로 보는 관점도 있고요. 하지만 이 모든 수식을 덜고 보면 헤다는 극단적으로 실존을 추구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연출님은 헤다가 '지금 여기' 우리와 어떻게 만나길 바라시나요?
‘헤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이자, 또 다른 차원을 향해 나아가는 불꽃 같은 존재예요. 그녀의 자살은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현실을 파괴함으로써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창조적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헤다의 죽음이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과하게 부정적으로 표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도 ‘21세기판 헤다’들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돈, 명예, 권력 등 사회 구조가 수직적으로 제안하는 가치들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들은 때때로 과감히 자기 파괴를 행하기도 하죠. 보편적인 가치라는 말로 개인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구조주의의 최면이 여전히 작동하는 한 자아의 본질을 찾고자 헤매는 헤다들은 늘 존재할 것입니다. 저도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21세기판 헤다들에게 우리는, 또 우리 사회는 어떤 손을 내밀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해 보고 있습니다. 공연이 개막하고 무대가 오르면 관객 여러분과도 이러한 고민과 사유를 연극으로 함께 소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재)국립극단 제공
고전의 다른 이름은 오리지널이 아닐까요, 무수히 변주되어 새로운 모양, 새로운 질감으로 무대가 있는 바로 그곳, 그 시간 속 관객과 만나니까요.
여러 '헤다'가 있었습니다. 그중 같은 헤다는 단연코 없었습니다. 이제 곧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날 헤다가 기다려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