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연 최고니까요..👍
카릴 처칠의 대표작 세 편을 동시 출간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이 나온 게 처음은 아닙니다. <미친 숲>, <넘버>가 먼저 소개됐죠. 마음 한쪽에 초기 대표작 세 편도 새로 출간하고 싶단 바람이 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원(願)을 이룹니다.
“왜 카릴 처칠이냐” 물으실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 둬야 한다”라는 철학에 따라 처칠이 인터뷰를 극도로 꺼린 탓에 자료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 마저 10년 전 기사이긴 하지만, 처칠을 알아 가는 데 적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랍니다.
*원문을 적절히 재구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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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함의 미학: 카릴 처칠이 영국 연극계를 정복한 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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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릴 처칠은 인터뷰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그런 탓에 과거에는 과소평가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그녀에게 영국 최고의 극작가라는 찬사가 따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 번에 카릴 처칠의 작품 네 편이 주요 프로덕션으로 재조명되었습니다. 영국 내전을 배경으로 한 극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1976)이 내셔널 시어터에서 상연되었고, 독재와 저항에 관한 우화를 담은 <저 멀리>(2000)는 영 빅(Young Vic) 무대에 올랐습니다. 영 빅은 이어서 너필드 사우샘프턴 프로덕션으로 복제 인간을 다룬 SF 희비극 <넘버>(2002)를 상연했습니다. 이듬해 여름, 맨체스터 국제 페스티벌에서 티키팅이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 맥신 피크가 변신 능력을 지닌 고대 요괴를 연기한 <스크라이커>(1994)였습니다. 역시 카릴 처칠의 작품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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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시어터에서 제작한 <버킹엄셔에서 비치는 빛>(2015) 장면. 린지 터너(Lyndsey Turner)가 연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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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에 걸쳐 쓰인 작품들이 연속해서 재조명된 것과 동시에 신작 두 편 또한 세계 초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2015년 11월 27일 내셔널 시어터에서 <히어 위 고(Here We Go)>가 막을 올렸고, 2016년 1월 로열 코트에서 <이스케이프드 얼론(Escaped Alone)>이 공연된 것입니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주목받는 프로덕션 여섯 편을 달성하는 경우는 셋입니다. 극작가가 80세 이상이거나(처칠은 당시 77세였습니다), 세상을 떠났거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거나. (당시 처칠은 셋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죠.) 이런 ‘페스티벌’이 자연스럽게 성사되었다는 사실은, 한때−아마도 여성이었기 때문에, 또 언론 인터뷰를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에−과소평가되었던 그녀가 이제 톰 스토파드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 작가’ 반열에 들었음을 방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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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골든 시어터 소사이어티의 <이스케이프드 얼론>(2019)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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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작품의 재공연이 한꺼번에 몰리면 극작가의 명성에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칠에겐 오히려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죠.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은 내셔널 시어터가 화려한 연출을 시도했지만 다소 정적인 무대로 인상이 가장 미약했습니다. 특히 1647년 퍼트니 논쟁(국민군이 헌법과 정치 개혁을 놓고 벌인 토론회)에서 발췌한 자료가 원래 창작 장면을 압도했습니다. 그럼에도 영국 내전 중에 발생한 급진적이고 종말론적인 종교 집단에 주목한 점은 그녀의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였습니다. 반면 다른 작품들은 세월과 함께 성숙해졌고, 재공연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저 멀리>는 전쟁에 휩싸인 익명의 국가가 배경이며, 화려한 모자를 만드는 공장이 사실 끔찍한 목적을 위한 곳이었다는 설정입니다. 독재와 저항, 지도자들이 공포와 화려한 의식을 도구 삼아 국민을 억압하는 방식에 대한 날카로우면서도 동화 같은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느낌을 더해 주었습니다. <스크라이커>는 처칠이 환경 문제에 대해 다른 극작가들보다 훨씬 먼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몸과 목소리를 온전히 활용한 맥신 피크의 매혹적인 연기는 처칠이 ‘리어 왕’과 ‘프로스페로’(<폭풍>)를 여성적으로 융합한 배역을 창조해 냈음을 증명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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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커>(2015) 장면. 유아 살해, 식인 풍습, 산후 우울증, 임박한 생태 재앙을 다룬 이 공포 우화극에서 맥신 피커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며 영국의 국보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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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의 재공연은 그중 가장 위험했습니다. 이 작품의 바탕이 된 의학적 가능성−한 남자가 자신이 죽은 형의 세포로 만들어진 여러 복제 인간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이 이제는 SF라기보다 과학사에 가까운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이클 롱허스트 연출은 극 중 부자 역할에 실제 부자지간인 배우 존 샤프넬과 렉스 샤프넬을 캐스팅함으로써 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톰 스컷의 무대 디자인 또한 특별했습니다. 작품은 사방을 양면 거울로 둘러싼 박스형 공간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연출되었습니다. 처칠의 텍스트가 얼마나 유연한지가 입증된 거죠. 2002년 로열 코트에서 있었던 초연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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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 핀들리 연출로 브리지 시어터에서 공연된 <넘버>(2020)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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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일반적으로 처칠의 최고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클라우드 나인>(1979), <톱 걸스>(1982)−각각 제국주의와 페미니즘을 다룬 시간 여행극−그리고 금융계의 도덕적 타락을 풍자한 운문 희극 <시리어스 머니>(1987) 같은 작품들 말입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들로 그녀의 명성이 더 높아졌다는 건 그녀의 작품들이 ‘블루칩(Blue-chip)’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1976년부터 2002년까지의 작품들에는 등장인물과 배경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처칠의 희곡들은 점점 더 과감하게 전통적 형식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드렁크 이너프 투 세이 아이 러브 유?>(2006)는 두 남성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대 지문은 생략되었죠. <러브 앤 인포메이션>(2012)은 아예 짤막한 장면 50여 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전쟁을…” 같은 미완성 문장이 많고요. 오늘날 대부분의 작가들이 조상도 알아볼 법한 희곡, 소설, 시를 정해진 틀 안에서 작업하는 반면, 처칠은 매번 연극을 새롭게 구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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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맥도널드가 연출을 맡은 <러브 앤 인포메이션>(2012) 트레일러. 2023년 진해정 연출로 두산아트센터에서 한국 초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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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구조를 벗어나고, 점점 더 간결해지는 그녀의 스타일은 사뮈엘 베케트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결정적인 차이가 있죠. 베케트의 무대 지문은 마치 안무 기록처럼 상세하고 정밀합니다. 반면 처칠은 최근 선보인 작품에서 거의 모든 지문을 생략해 버렸습니다. 그녀와 자주 작업해 온 연출가 제임스 맥도널드는 “거의 모든 지시를 없앴어요. 연출자와 배우들에게 엄청난 자유가 주어지죠”라고 말합니다. 보통 대본을 받으면 극단은, 예컨대 중년 남성 두 명과 아이 한 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러브 앤 인포메이션>에서는 등장인물이 명시되지 않아 맥도널드는 오디션 대신 일주일간 워크숍을 통해 배우 열여섯 명을 뽑고 그들에게 100개 이상의 역할을 나누어 맡겼습니다. <드렁크 이너프 투 세이 아이 러브 유?>는 심지어 연습 2주차에야 무대를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극의 배경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연함은 새 작품 <이스케이프드 얼론>과 <히어 위 고>에서도 이어집니다. 점점 더 많은 여성 연출가들이 처칠의 작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과거 처칠의 주요 작품 초연은 모두 남성 연출가가 담당했지만, 재공연에서는 린지 터너, 케이트 휴잇, 사라 프랭컴 등 여성 연출가들이 지휘했습니다. 2015년 발표된 두 편의 신작은 개인적, 행성적 ‘끝’을 다룹니다. <히어 위 고>는 죽은 사람을 다양한 방식으로 회상하고, <이스케이프드 얼론>은 네 사람이 뒷마당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 ‘재앙’을 암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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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뱅크 시어터에서 공연된 <이스케이프드 얼론(Escaped Alone)>(2023)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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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처칠은 연극의 상연 시간을 재정의했습니다. 그녀의 40∼50분짜리 단막극들은 이제 한 편의 완전한 공연으로 여겨집니다. “카릴은 무엇이 ‘저녁 공연’이 될 수 있는지를 바꿨다”라고 도미니크 쿡은 말합니다.
한때 과소평가되었던 처칠. 그러나 이제 그녀는 어떤 공백기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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