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과 움직이는 시(詩)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생강의 영화 이야기와 함께 읽어 볼 희곡 소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룰 영화는 짐 자무쉬의 <패터슨>입니다.
일상이 시, 영화가 되는 순간들을 찬찬히 뜯어봅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사소하고 익숙한 사물들로부터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 원리를 파헤쳐 봅니다.
함께 읽어 볼 희곡으로 장미셸 리브의 <동물 없는 연극>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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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켈리 라이카트의 <쇼잉 업>을 봤다. 일상의 사소한 고통에서 탄생하는 예술. 그 일련의 과정이 ‘다친 새의 날갯짓’이라는 움직임으로 발산하고, 관객에게 통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쇼잉 업>을 보고 ‘일상의 예술’이라는 주제로 썼던 <패터슨>에 관한 나의 글이 떠올랐다. <패터슨>뿐 아니라 최근 개봉한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나 <쇼잉 업>을 재밌게 본 분이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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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Jim Jarmusch)의 영화 <패터슨(Paterson)>(2016)은 미국 패터슨시의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상을 조명한다. 국내외 많은 평론가들이 주목한 <패터슨>의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일상과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혹자는 일상의 흔적들을 소재로 영상 작업을 해 온 작가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작품들과 <패터슨>이 소재 면에서 유사하다고 표현하며 이를 ‘일상 속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메카스의 소재가 가족, 친구들과의 평범한 일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패터슨>에서 자무쉬는 일상 소재로 시를 쓰는 주인공 ‘패터슨’을 내세운다. 패터슨은 매일 로라와 한 침대에서 일어나 버스 기사로서 일과를 마치고 강아지 ‘마빈’을 산책시키며 바에서 맥주를 마신다. 패터슨의 일과는 일주일 내내 반복된다. 이 반복 안에서 패터슨은 성냥, 맥주 같은 일상에서 마주친 사물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시를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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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 <패터슨> 중에서. 하루의 시작은 침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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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예술이 탄생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일상을 자각하는 것에서 창작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창작자를 둘러싼 세계 전반이 예술의 대상이자 소재인 셈이다. 예술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패터슨이 존경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예술관이기도 하다. 윌리엄스는 실제로 패터슨시 출신이며 시집 ≪패터슨(Paterson)≫(1946~1958)의 저자이기도 한데, 그는 “관념이 아닌 사물로(No Ideas But In Things)”라는 자신의 시론처럼 사물을 관념화하는 시어 대신 사물의 이미지 자체에 주목하는 간단명료한 사물시를 주로 쓴다. “붉은 손수레(The Red Wheelbarrow)”나 “위대한 형상(The Great Figure)” 같은 시에서 드러나는 일상 언어, 새로운 리듬, 명확한 이미지, 견고함, 명료함, 압축성 등은 윌리엄스를 이미지즘 시인으로 평가하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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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시의 이미지와 영화의 이미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첫째, ‘지속’ 관점의 차이다. 지속이란 ‘이전과 이후 상태의 질적 변화를 야기하는 것’으로,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이 주장한 개념이다. 지속은 곧 물질의 연장성이다. 질적으로 변화하는 불가분한 연속체는 기계론적 결정론이 간주하듯이 기하학적 공간과 동일시되어 취급될 수 없다. 영화 이미지는 지속을 동반하지만 윌리엄스가 말하는 시의 이미지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기 때문에 둘은 서로 다르다. 혹자는 윌리엄스의 작업을 사진 촬영과 유사한 것, ‘찰나의 포착’으로 본다. 그러나 영화 이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을 담는다는 점에서 찰나의 포착과는 거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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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미지 생산 주체의 차이다. 아무리 화자의 목소리를 빌린다 하더라도, 시 이미지는 시인(주체)이 사물을 인식함으로써 형성되기 때문에 주관적 휘어짐을 수반한다. 하지만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를 활용하는 영화 이미지는 인식 주체가 발견하지 못한 사물들마저 프레임에 포함함으로써 나름의 객관성을 획득한다. 앙드레 바쟁(André Bazin)과 같이 영화를 리얼리즘 미학 전통에서 해석하는 평론가들은 딥 포커싱(deep focusing) 등 특정 사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프레임 내 전체를 비추는 기법이 인식 주체가 포착하지 못하는 사물의 실재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패터슨>에서도 이러한 영화 이미지의 특징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카메라 시점에서 촬영된 패터슨시와 패터슨 시점을 빌린 패터슨시가 합쳐지는 것이 그러하다. <패터슨>의 이미지들은 패터슨의 주관적 이미지와 카메라에 찍힌 객관적 이미지가 결합된 특수한 상태에 머무른다. 서사 안에서 패터슨의 주관적 이미지 결과가 사물시라면, 종합적 이미지의 결과는 <패터슨>이라는 영화 전체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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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편집자 주 : 들뢰즈가 저서 《시네마》에서 개진한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개념을 차용해 <패터슨>의 영화적 특성을 분석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 호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해서는 작년 12월 17일 발행한 뉴스레터 <소개가 늦었습니다> 편, ‘#2. 들뢰즈에 빠져 있었습니다’ 참고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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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의 주인공인 패터슨시의 버스 기사 패터슨은 역시 패터슨시 출신 시인이자 시집 ≪패터슨≫의 저자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동경한다. “관념이 아닌 사물로”라는 윌리엄스의 시론처럼 패터슨은 관념적인 것이 아닌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에서 시의 이미지를 얻는다.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사랑 시(Love Poem)’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시는 실제로는 자무쉬의 지인이자 뉴욕파 시인이기도 한 론 패짓(Ron Padgett)의 사물시로, ‘오하이오 블루 성냥’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성냥을 묘사하는 시어는 사물의 지속을 드러낸다기보다 ‘현재’의 ‘현실화’된 사물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성냥의 색상이나 상태 등에 대한 현재적 묘사가 그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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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튼튼하고 어둡고 옅은 파란색 상자에 멋지게 포장되어 있는데, 흰 라벨에 확성기 모양으로 박혀 있는 글자가 마치 세상에 큰 소리로 외치는 것 같아, They are excellently packaged, sturdy little boxes with dark and light blue and white labels with words lettered in the shape of a megaphone, as if to say even louder to the wor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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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패터슨이 이 시를 쓰는 순간을 한 번에 담아내지 않고, 패터슨이 버스를 정비하는 시간, 운전하는 시간, 점심 먹는 시간 등 패터슨의 일과에 나누어 배치한다. 이에 따라 시의 이미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성냥을 손에 쥔 패터슨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는 몇몇 숏에서는 성냥에 대한 묘사가 시어로 등장하지만 다른 시어들을 쓸 때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것들을 목격하는 패터슨의 모습이 등장한다. 오하이오 블루 성냥이라는 재현 가능한 사물에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시어에 영화는 ‘세계를 지각하는 패터슨’이라는 운동-이미지를 부가해 시어의 물성을 구체화한다. 이 시는 영화를 기준으로 둘째 날인 화요일 오전 로라와 아침 인사를 나눈 다음 완성되는데, 이에 따라 “사랑 시” 마지막 구절 오하이오 블루 성냥의 불꽃은 로라에 대한 패터슨의 사랑의 불꽃이라는 의미로 전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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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당신이 내게 준 것(불꽃)이요, 나 담배 되고 그대 성냥 되어, 아니면 나 성냥 되고 그대 담배 되어, 천국으로 불타오르는 뜨거운 키스와 함께.
That is what you gave me, I become the cigarette and you the match, or I the match and you the cigarette, blazing with kisses that smoulder toward heav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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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 <패터슨> 중에서. 패터슨은 성냥을 볼 때만 성냥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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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쓰인 시어 한 구절 한 구절이 성냥에 대한 찰나의 이미지라면, 시 전체의 지속 안에서 계속되는 성냥 이미지의 질적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패터슨이 지각하는 세계의 운동성이다. 그래서 <패터슨>은 시적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순간의 심상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순간의 심상을 만들어 내는 세계의 운동-이미지 전체에 주목하는 영화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패터슨>은 대상의 ‘언표화’가 아닌 ‘이미지화’를 기획하고 있으며, 이는 영화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획이기도 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미지를 언표로 대체하는 것은 “이미지의 가장 고유한 명시적 특성, 즉 운동을 제거”하는 것이다. <패터슨>에서는 언어적 양태인 ‘시’조차 언표이기를 멈추고 ‘이미지’ 자체로 환원된다. 많은 평론가들이 <패터슨>이 ≪패터슨≫의 미학적 관점과 조응한다고 평했는데, 이는 <패터슨>이 추구하는 ‘실재에 대한 탐구’라는 관점에선 옳지만 물질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는 옳지 않다. <패터슨>은 기존 언어 양식을 영화라는 운동적 매체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윌리엄스의 시론에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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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은 ‘시작(詩作)’이라는 사물의 분절 작업을 영화라는 운동-이미지 안에서 새로 구성한다, 사물의 지속을 직관하는 인물의 운동을 지극히 영화적인 형식미 안에서 시각화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윌리엄스의 사물시가 사물의 순간 상태에 대한 시적 의미에서의 심상을 보여 준다면, 자무쉬의 <패터슨>은 이러한 심상이 만들어지는 감각-운동적 도식(sensory-motor schema)에 의한 과정 자체를 운동-이미지를 통해 표현한다. <패터슨> 속 시는 언어가 아닌 운동-이미지로 구현된 사물, 즉 이미지의 총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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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시”가 운동-이미지의 현실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시작에 대한 <패터슨>의 관점을 드러낸다면, 영화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시 “다른 하나(Another One)”는 영화의 운동-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영화 서사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시는 ‘차원’에 관한 것으로, ‘시간’이라는 관념을 시어를 통해 직접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차원에 대한 이러한 관념적 사유 뒤에 위치하는 것이 맥주잔을 내려다보는 자신의 일상이라는 것이다. 남다은 평론가는 이 시를 <패터슨>의 세계가 관념에서 사물로 이행하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본다. 실제로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시간에서 맥주잔으로의 시점 변화는 시간을 관념이 아닌 사물과 연결해 표상 가능한 이미지로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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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 <패터슨> 중에서. 패터슨은 맥주 한 잔과 함께 하루를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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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릴 적에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배우지: 높이, 너비 그리고 깊이. 마치 신발상자처럼. 그리고 나중에 네 번째 차원이 있다고 듣게 되지: 시간. 흐음. 그러면 누군가 말하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있으리라고… 난 일을 마치면 맥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르지. 잔을 내려다보면 기분이 좋아져.
When you’re a child you learn there are three dimensions. heights, width and depth. Like a shoebox. Then later you hear there’s a fourth dimension: time. Hmm. Then some say there can be five, six, seven… I knock off work, have a beer at the bar. I look down at the glass and feel gl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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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자체로 사물시의 방법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보다는 영화의 운동-이미지를 서사 측면에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패터슨>에서 맥주잔 숏은 시간 경과를 표현하는 대응 숏이기 때문이다. <패터슨>에서 맥주잔을 내려다보는 장면은 매번 전날과 다음 날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시에서 말하는 맥주잔을 내려다보는 ‘기분 좋음’은 일종의 감정-이미지(affection-image)로, 다음 날이라는 시간적 연속성과 연결된다. 들뢰즈는 이러한 운동-이미지를 통한 몽타주 구성이 시간의 간접적 재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잠재 세계의 현실화 과정이기도 한 운동-이미지의 구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계침의 선형적 시간을 따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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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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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셸 리브는 일상의 순간에 주목한 극작가입니다. 익숙하고 사소하고 그래서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순간에 돋보기를 들이댑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던 인과의 연결이 묘하게 뒤틀려 있고, 틈에선 샘물처럼 부조리가 솟구칩니다.
8편의 단막극으로 구성된 <동물 없는 연극>은 바로 그런 순간에서 출발합니다. 집, 정원, 극장, 박물관 같은 공간에서 평범해 보이는 형제, 부부, 부녀, 친구들이 대화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입니다. 여기에 돋보기를 대 봅니다. 대화는 엉망진창, 관계는 파탄 직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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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 내가 형보다 더 똑똑해졌어. 앙드레 : 아, 그래? 자크 : 응. 사이. 앙드레 : 언제 그렇게 됐어? 자크 : 한 시간 전쯤, 음, 한 시간 반 전에…. 앙드레 : 최근 일이구나. 자크 : 형한테 제일 먼저 말하는 거야. 앙드레 : 감동인데. 자크 : 당연하지, 형젠데. 앙드레 : 그렇지. 자크 : 게다가 형이잖아! 사이. 앙드레 : 많이? 자크 : 뭐? 앙드레 : 네가 나보다 엄청 많이 똑똑해졌냐? 자크 : 그런 것 같은데. 앙드레 : 그럼 그래야지. 자크 : 나 오래전부터 그러고 싶었던 거 알아? 앙드레 : 그건 몰랐는데. 자크 : 다섯 살 때부터야. 앙드레 : 아, 오래되기도 했구나! _<평등-박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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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장면은 예기치 못한 놀라운 순간들로 대체됩니다. 이제 예술이 힘을 발휘할 차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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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없는 연극>은 치사함, 비루함, 비겁함, 종교에 대한 편협함, 지적 허영심 등 언제 어디서나 보게 되는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일상을 일그러뜨리며 시도한 풍자는) 천박한 코미디나 사회 부조리에 대한 격한 비판으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격조와 조화를 유지하며 시, 환상, 파스, 철학 등을 담고 있는 조각조각의 퍼즐을 통해 따뜻한 휴머니즘을 전한다. _<동물 없는 연극>(임혜경 역/해설) 해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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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은 일상을 비틀어 보기에 좋은 때입니다. 새로운 결심, 새로운 시도, 새로운 관계.
머지않아 모든 게 원점으로 되돌아오리란 걸 압니다. 하지만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면 원점으로부터 미세하게 멀어져 있을 겁니다. 언젠가 그 틈에서 무엇이든 솟구칠 거고요. “예기치 못한 놀람!”
그러니 도로 아미타불도 두려워 말아요. 사흘 갈지라도 작심하는 새해 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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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안 마르시아와 마크 드 파베리가 연출한 장미셸 리브의 <동물 없는 연극> 공연 장면(2022, Collège Saint-Andr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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