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멈추지 말아요, 마주한 세계가 부조리하다면 더욱! ‘드라마(drama)’는 그리스어 ‘드란(dran)’에서 왔습니다. ‘드란’에는 ‘행동하다(to act)’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동’은 드라마의 본성 중 하나입니다. 창작자와 관객이 무대를 매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생각하면 ‘드라마’의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이 논문은 정치와 연극/드라마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중 18세기 프랑스 혁명 시기에 연극과 정치가 결합하는 과정을 발췌 소개합니다.
지금 연극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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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부터 1799년까지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격변을 겪었습니다. 왕정이 무너졌고 잠깐 민주주의가 나타났다가 곧 독재로 대체되었습니다. 혼란한 가운데 연극은 유례없이 번성했습니다.
극장은 대중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공론장이었습니다. 혁명 기간에 정부는 극장과 예술인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며 극장 예술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그럴수록 극작가와 배우들은 드라마를 통해 혁명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며 정치 변화를 촉진했습니다. 왕정이 전복되고 들어선 입법 의회와 국민 공회는 어느 정도 연극적으로 운영된 측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정치와 연극이 결합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인쇄물이 혁명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습니다. 최근엔 연극이 사회 변혁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폭넓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우선 연극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중요한 매체였습니다. 문맹자를 비롯한 모든 사회 계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혁명의 메시지가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 당시 연극은 단순 오락의 범주를 넘어 대중 참여와 정치 담론을 활성화하는 공론장이었던 거죠.
마빈 칼슨(1996)은 프랑스 혁명 시기 수천 개의 소극장이 생겨난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파리 연극은 아카데미 로얄 뮈지크, 코메디 프랑세즈, 코메디 이탈리엔 이렇게 세 개의 왕실 후원 극장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혁명 이후 소규모 민간 극장들이 생겨나면서 왕실 후원 극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개별 극단은 점점 더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며 자신들의 관점을 대변할 만한 작품들로 레퍼토리를 구성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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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아카데미 로얄 뮈지크, 코메디 프랑세즈, 코메디 이탈리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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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조셉 셰니에(Marie-Joseph Chénier)의 <샤를 9세 혹은 왕들의 학교>는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던 가운데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연극이 어떻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대중을 결집시켰는지 보여 주는 대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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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셰니에의 <샤를 9세 혹은 왕들의 학교> 초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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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매슬런(1995)은 <샤를 9세>가 “혁명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요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이 비극은 ‘성 바돌로매 대학살’을 통해 군주제와 성직자 계급을 비판합니다. 왕실 검열로 1788년 공연이 금지되었지만 셰니에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1789년 7월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그날 이후, 혁명 지도자들은 셰니에의 작품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비극이 혁명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본 거죠. 특히 조르주 당통은 <샤를 9세> 공연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배우들은 공식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객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관객들은 ‘더 이상 허가는 필요없다’라고 외치며 자신들 이외에 다른 누군가의 허가나 명령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매슬런, 1995, p. 34).
칼슨(1996)은 이 사건이 “문학적 의제가 아닌 정치적 의제에 의해 희곡이 요구된 첫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습니다. 셰니에는 “연극의 자유가 언론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언론 자유를 옹호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최초 혁명 시장의 발언을 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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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자유가 공공의 자유의 기초가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극장을 언론과 같은 수준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곳에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자극한다. 이는 도덕성을 타락시킬 가능성이 있다.” (매슬런, 1995, 3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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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달리 연극에는 집단적 열정을 고조시키고 정치 불안정을 야기할 잠재력이 있음을 우려하는 당시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동시에 연극이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자극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인식되었음을 암시합니다.
1789년 11월 마침내 <샤를 9세> 공연 허가가 떨어집니다. 이후로도 작품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계속되었는데, 그 전개 양상은 연극이 정치에 도전하고 정치를 변화시키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예술가들이 정치적 영역에서 행동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죠.
대중은 검열의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왕실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극장 자유 법안(Freedom of Theatres legislation)’이 제정되었습니다. 연극이 검열에서 자유로워진 겁니다. 이제 연극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에 그치지 않고 대중의 정치적 의사소통, 권력 구조 변화를 촉진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1792년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고 “대표성(representation)”이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습니다.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정부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다수는 대의 민주주의를 지지했습니다. 대중이 선출한 의원이 대중을 대신해 대표성을 가지므로 선거가 끝난 뒤 대중의 정치적 역할은 위축된다고 본 거죠. 같은 시기 극장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극장은 대중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관객은 극장에서 직접 검열을 통해 공연 내용을 좌우하며 자신들의 의사를 강하게 표출했습니다. 그러니까 극장은 대중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었던 거죠.
매슬런은 극장이 대중 통제를 받았다는 점에서 정치적 대표성을 표방하는 공회와 본질적으로 달랐다고 지적합니다.
“극장은 직접 민주주의의 구현체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정치 기관의 대안이자 잠재적 경쟁자로 여겨졌다.”
혁명 공간에서 시민들은 검열 권한이 자신들에게 속한다고 주장했고, 극장에서 이런 주장을 현실화했습니다. 극장이 어째서 직접 민주주의의 구현체인지 보여 주는 사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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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슨은 자코뱅파가 보드빌 극장에 몰려가 동료 살리소와 셰니에를 조롱한 작품의 공연을 방해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대다수 품위 있는 시민들이 자코뱅파를 침묵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자코뱅파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2. 한 배우가 관객들 앞에서 저녁 공연 결원에 대해 안내할 때 무심코 “신사 여러분(Messieurs)”이라고 하자 관객들은 “더 이상 그런 호칭은 없다”며 “시민(Citiz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3. 1795년 1월 22일 오페라 극장에서 관객들은 무대 위 시가 적힌 쪽지를 던지며 배우들에게 그것을 낭독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관객들은 마라(Marat) 흉상을 무너뜨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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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정치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연극적 요소가 발견됩니다. “의회장은 극장 공간과 유사했습니다. 의원석 맞은편에 무대처럼 연출된 연단이 있었고 홀의 삼면에 관객을 위한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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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7년 11월 19일 <팔레 드 쥐스티스(Palais de Justice)>에서 열린 파리 의회의 특별 회의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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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파는 정치에 스며든 연극적 요소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동시에 대중 감시를 위해 더 많은 시민을 관객으로 불러들여야 하는 역설에 직면했습니다. 의회장에서 관객들에게 예의를 지키고 침묵하도록 요구했는데, 이는 대중 통제와 억압의 시도로 해석됩니다. 공포 정치의 상징인 단두대와 공개 처형은 정치의 가장 연극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91년 6월 4일 의회에서 나온 “처벌은 죄인보다 이를 지켜보는 대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발언이 그 극적 성격을 분명히 해 줍니다.
정치에 스며든 연극적 요소의 예를 더 살펴볼까요? 극장에서 관객과 배우가 직접 상호작용했던 방식이 입법 및 사법 절차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자코뱅파는 엄격한 규제를 통해 대중을 침묵하는 관찰자로 만들려 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습니다. “날마다 쏟아진 격려, 모욕, 위협이 의원들 결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매슬런, 2005, 26쪽)으니까요.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법자들은 어느 정도 배우처럼 행동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와 파브르 데글란틴의 관계가 이런 혼란을 잘 보여 줍니다. 로베스피에르는 파브르가 다른 대표자들을 배우로 만들었다고 비난한 반면 파브르는 로베스피에르가 가면을 쓰고 권력을 얻으려 한다고 의심했죠. 이처럼 “모두가 (정치라는) ‘연극’에 참여하는 가운데, 입법 회의는 어떤 시민이 배우로 권한을 부여받았고 어떤 시민이 배우를 감시하는 관객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부는 관료들에게 정해진 의상을 착용하도록 함으로써 둘을 구분했습니다”(시드니 피츠제럴드, 2015, pp.146-147). 정부가 정치에서 연극적 요소를 배제하려 했음에도 정치는 오히려 극장의 특성을 점점 더 닮아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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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이슈만이 묘사한 1793년 단두대 의한 처형 장면(1903). 단두대에서의 공개 처형은 혁명기 정치와 연극의 결합을 보여 주는 대표 사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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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진행 과정에서 연극이 동원된 방식에는 국가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다 다시 권위주의로 회귀하는 역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혁명 이전 연극은 왕실과 교회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극장에서 상연될 작품들은 검열을 거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혁명기에 민간 극장이 급증하면서 극장은 관객과 배우가 상호작용하는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국민의회가 결성되고 헌법이 제정되는 등 민주적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관객은 검열로 상연이 금지되었던 작품(<샤를 9세>)을 공연하도록 극장에 요구했고 그 과정에서 극장은 민주적 공론장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791년 극장 자유 법안이 통과되면서 사실상 검열이 철폐되었습니다. 이후 입헌 군주제가 수립되어 국왕과 입법 의회가 권력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극장은 다양한 내러티브를 수용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1792년 국왕이 폐위되고 공화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통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극장은 검열 없이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공간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1793년 공안위원회는 극장에 대한 검열을 부활시켰습니다. 이른바 공포정치의 시작이었습니다. 극장은 다시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했고,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도 억압되었습니다.
그러다 1795년 국민공회가 해체되고 총재정부가 수립되면서 선거가 중단되었습니다. 극장 수가 제한되었고 레퍼토리 구성도 정부 통제 아래 놓였습니다. 나폴레옹 집권과 함께 결국 정치는 권위주의로 회귀합니다.
이처럼 극장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정치 변화를 반영하고 다시 정치에 영향을 미친 공간이었습니다. 혁명 초기 극장은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고 정치 담론을 활성화하는 민주적 공간이었지만, 이후 검열과 억압으로 그 기능이 일방적인 정보 전달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의 사례는 연극이 민주화 과정에서 어떻게 중요한 공론장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동시에 권위주의의 재등장이 이를 어떻게 억압할 수 있는지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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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절대 그 누구도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연극은, 그걸 만드는 사람들조차 변화시키지 않아요. 용감함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실제 삶에서 완벽한 겁쟁이들이고, 무대에서 자유를 외치는 연출들은 실제 삶에서는 끔찍한 폭군들이지요. 우리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어요, 우리가 글로 쓰는 말들을 날마다 수백 번은 저버리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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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에서 젊은 극작가 스카르파가 한 말입니다. 네, 연극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조차 바꾸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연극은 삶의 방식과 조건들을 바꾸어 왔습니다. 연극이 의도한 건 아니라 해도.
그러니 연극을 멈추지 말아요. 지금 마주한 세계가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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