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리고 미드소마 📽️ 매달 마지막주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의 영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런 함박눈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큼직한 눈송이가 우산 위로, 어깨 위로 척척 소리까지 내며 내려앉을 땐 설레기도 했습니다. 질척이는 길에서 바짓단이 젖을까 조심하면서는 짜증이 났죠. 대설과 한파가 예비된 겨울 초입에서 리뷰할 영화, 희곡은 공교롭게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리고 <8월의 색>입니다.
*이 글은 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아리 애스터 <미드소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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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서울프라이드영화제가 있는 달이다. 참석하진 못했지만 11월에 걸맞은 작품을 생각하다 예전에 써 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영화가 무척 좋았기에 영화가 다다른 결말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해 보며 쓴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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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기 있다, 당신을 찾아 내려왔으니. 당신을 되부르는 것은 노래, 기쁨의 노래이자 마찬가지로 고통의 노래. 약속. 저곳에서는 형편이 이전과 달라질 것이라는.
당신은 오히려 아무런 느낌도 없이 가고 싶어 했다, 공허와 침묵. 바다 심연의 정체된 평화, 수면의 소음과 실제보다 더 편안한. (……) 그는 너무 멀리 왔다. 그는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고, 이곳은 어둡다. 돌아가, 당신은 속삭이지만,
그는 당신이 다시 자신을 살려 주기를 원한다. 아 한 움큼의 거즈, 약간의 붕대, 한 줌의 차가운 공기, 당신이 자유를 얻는 것은 그를 통해서가 아니다. _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 〈에우리디케(Euryd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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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이즈의 초상을 그리던 도중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는 엘루이즈의 목소리에 당황하던 마리안느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이전까지 스스로를 ‘보는 자’(주체)에 위치시키던 마리안느가 자신이 ‘보여진다’(대상)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윽고 엘루이즈가 마리안느를 그려지고 있는 자신의 자리, 정확히는 자신의 숏에 불러온다는 것이다. 분리된 숏-역숏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한 숏의 풍경으로 합쳐진다. 이 장면은 대사를 통해 그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지만, 구조적으로 봤을 때는 사실 엘루이즈가 맨 처음 등장하던 순간의 구도를 반복한 것이기도 하다. 엘루이즈는 영화에서 ‘뒷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점은 마리안느의 시점이다(이때 마리안느의 눈이 엘루이즈의 어머니가 요청한 ‘감시자의 눈’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직전에는 마리안느가 하녀에게 엘루이즈의 언니가 자살한 것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윽고 절벽으로 뛰어가는 엘루이즈가 등장한다. 사전 정보에만 의존한 마리안느의 시선을 공유하는 우리는 엘루이즈가 자살 시도를 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엘루이즈의 뜀박질이 산책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됨과 동시에 이 시점 숏은 곧 두 인물이 동시에 프레임인 하는 풍경의 숏으로 전환된다. 이 숏 안에서 엘루이즈는 자신을 흘깃거리며 관찰하는 마리안느의 눈길을 받아친다. 마리안느의 프레임인과 함께 엘루이즈는 마리안느 그리고 우리의 해석 대상에서 벗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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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서. 마리안느를 응시하는 엘루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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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홀로 서 있는 인물들은 계속해서 누군가의 프레임인을 통해 채워진다. 나는 영화의 이러한 구조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관계’ 나아가 이러한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조는 마리안느와 엘루이즈의 사랑이라는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 중 하나를 떠올려 보자. 하녀의 십자수 장면으로 시작한 숏이 자연스럽게 확장되어 마리안느, 엘루이즈가 포함된 세 여자의 노동을 동시에 조명한다. 이때 세 여자는 셋으로 똑같이 분할된 프레임을 부여받으며, 누구도 서로를 침범하거나 밀어내지 않는다. 이전 마리안느와 엘루이즈의 숏이 그랬듯, 한 프레임에 수평으로 위치한 셋의 운동은 순간 그들의 위계를 지워 버린다. 그들의 운동은 개별적이면서 동시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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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리듬은 숲속(오프닝 시퀀스의 뱃사공 말을 통해 이 숲이 남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익명의 여성 공동체로 확장된다. 특히 시간상 영화 중앙에 위치한 여자들이 함께 노래하는 장면은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셀린 시아마의 매우 적극적인 시각화다. 불길에 가려진 엘루이즈의 모습, 그리고 이를 감싸는 노랫소리. 이 장면에서 주체의 명증성은 상실되고(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그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때의 엘루이즈를 바다에 새겨 넣은 ‘풍경화’에 가깝다), 대신 익명의 몸들이 한 소리로 노래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자리한다. 영화에서 불타는 원피스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엘루이즈의 위태로운 형상보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인’ 해 엘루이즈를 부축하는 여자들의 손길이다. 이 장면이 하나의 목소리로 공명하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영화적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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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서. 여러 세대의 여성이 불을 둘러싸고 노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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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새로운 공동체를 그려 내는 장면에서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가 표상하는 공동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의식처럼 성관계를 치르는 크리스티안을 둘러싼 여자들의 신음 소리, 그리고 대니와 함께 울어 주는 여자들의 모습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숲속 장면과 무척 닮았다. 다만 <미드소마>에서 이 공동체는 영화가 찾은 구원의 공동체인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모계 전통을 간직한 이 공동체의 목소리는 평등하다 못해 강박증적인 동일성의 규칙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나는 애스터의 세계관이 ‘호러’라는 장르적 장치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미드소마>는 대안적 공동체의 낭만성에 기대는 대신 그 자리에 공포를 새겨 넣어 상상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끝내 대니는 ‘메이퀸’으로서 공동체원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 인정 투쟁을 마치기 위해서는 ‘외부인(자신이 포함되었던)의 처단’이라는 확실한 대가가 필요하다. <미드소마>의 마지막, 대니는 애인 크리스티안이 곰 시체 안에 갇혀 불타는 장면을 바라보며 웃는다. 미친 듯이 웃으며 춤추는 공동체원들 뒤로 대니의 서슬 퍼런 웃음을 클로즈업하는 마무리 장면은 대니를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 치유받게 함과 동시에 영화의 공동체적 상상력이 나아가는 지점을 의문에 부치는 양가적 숏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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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애스터, <미드소마> 중에서. ‘메이퀸’ 대니의 웃음에는 치유와 공포가 동시에 어른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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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공포 대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대가를 지불한다. 바로 영화 속 마리안느와 엘루이즈의 이야기를 ‘과거’라는 꿈의 세계에 부쳐 버리는 것이다. 영화는 마리안느의 기억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배치해 마리안느와 엘루이즈의 사랑 이야기를 오르페우스 신화와 함께 다시는 접근할 수 없는 환상 영역에 박제해 버린다.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그들이 살던 시대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이 과거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문제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플래시백의 주인공이 엘루이즈가 아닌 마리안느라는 사실, 마지막에 엘루이즈를 바라볼 권리가 마리안느에게만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 해석에서 우리를 한 발 더 나아가게 만든다. 영화는 단순히 ‘시대극으로서 영화의 현실적 선택’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결말로 나아간다. <미드소마>가 자신의 세계에 대한 애정과 공포라는 양가성에 휩싸여 있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세계의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환상과 현실의 비정함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영화는 마지막까지 엘루이즈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뒤집힌’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엘루이즈)가 오르페우스(마리안느)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직접’ 요구했기 때문이다. 엘루이즈의 결혼은 죽음 혹은 사건 종결과 다름 없으며, 그러기로 결정한 것은 엘루이즈 자신이다. 이것이 영화가 뒤집은 오르페우스 신화의 결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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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마리안느를 따라 이미 종결된 사건에 사족을 붙이기 시작한다. 마리안느의 주체적 에너지가 발현된 오르페우스 그림 그리고 엘루이즈의 새로운 초상화에 새겨진 ‘28페이지(우리는 이 페이지를 지시하는 장면이 지닌 시점의 수평적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를 보고 마리안느와 우리는 미소 짓는다. 하지만 과거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 미소의 정체는 의심스러워진다. 영화가 현재로 돌아와서도 끝내 엘루이즈를 마리안느가 있는 연주회장에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가 환상이 아닌 현실의 엘루이즈를 확인함으로써 얻는 위안은 무엇일까. 이러한 장면들은 마리안느의 환상이 여전히 유효함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영화의 그릇된 소망인 것은 아닐까. 뛰어난 상상력으로 가득했던 이 영화는 그 상상력을 엘루이즈와 함께가 아닌 오직 마리안느의 기억 속에서만 복기함으로써 힘을 상실하는 것처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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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서. 오열하는 엘루이즈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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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미드소마>의 대니와는 달리 엘루이즈는 오열하는 모습으로 페이드아웃 된다. 나는 이 장면의 의도가 몹시 궁금하다. 스스로 에우리디케의 삶(혹은 죽음)을 선택한 엘루이즈는 그 선택을 후회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계>를 들으며 예전 마리안느가 말했듯 ‘음악’을 선물받은 기쁨에 가득 찬 것일까? 그 눈물은 어떤 해소의 눈물일까? 롱테이크로 정성스레 촬영된 눈물 흘리는 엘루이즈의 모습은 우리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한 개인의 심연을 비추는 듯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긍정하는 영화의 수많은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장면을 긍정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다음 의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안느의 시점 숏에서 엘루이즈가 눈물 흘리는 장면 뒤 ‘무언가’를 보고 싶어하는 나의(관객의) 심리는 무엇인가? 이때 마리안느의 시선은 관객과 동일한 기대를 품고 있는가? 무엇보다, 왜 엘루이즈는 끝내 돌아보지 않는 것인가? 플래시백 속 수많은 아름다운 풍경들과 달리 이 장면은 영화의 시작처럼 주체와 대상의 철저한 분리를 통해 구성된다. 한 숏에서 마리안느의 시선을 되받아치던 엘루이즈의 첫 등장을 떠올리면 마리안느의 시점 숏 안에서 끝나고 마는 그 씁쓸한 퇴장에 못내 미련이 남는다. 현실의 엘루이즈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는 말을 끝마칠 수 없다. 영화가 오르페우스를 뒤집는 데는 성공했지만 환상 속 에우리디케의 눈물까지는 닦아 주지 못한 까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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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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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죽음을 건너 힘들게 재회한 연인을 지상으로 데려오기 위해 오르페우스가 지켜야 할 건 딱 하나였습니다. “돌아보지 말 것!” 하지만 지상에 닿기 직전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봅니다. 죽음이 그대로 에우리디케를 삼켜 버립니다. "오르페우스, 대체 왜?"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부른 거라면? 그렇게 저승에 남기로 선택한 거라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신화를 복원하고 뒤집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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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2019) 장면. 음악 : 에반드로 마테(Evandro Matt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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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마 페드레로의 단막극 <8월의 색>은 마리아와 라우라의 재회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만남은 마리아의 간절한 바람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두 사람은 한창때 함께 화가의 꿈을 키우며 깊이 교감했습니다. 라우라는 일찍 재능을 인정받아 잘나가는 화가가 되었고 마리아는 그런 라우라를 동경했습니다. 그러다 돌연 라우라가 사라졌습니다. 8년이 흐릅니다.
화가로 성공한 마리아가 라우라를 찾아냅니다. 모델 에이전시에서!
라우라는 마리아와의 재회가 당황스럽습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친구보단 연인에 가까운, 애증과 집착이 범벅된 두 사람의 진짜 관계가 드러납니다. 둘은 이 잠깐의 재회 이후 영영 이별하게 됩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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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 대체 왜!”
지상에 안전하게 발을 딛기 전, 맞잡은 손이 에우리디케의 것인지 허상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어둠을 헤쳐야 했던 오르페우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질문이 터졌을까요? “에우리디케, 네가 맞는 거지?” “잘 따라오고 있는 거지?” “너도 나와 함께 돌아가고 싶은 거지?” 간절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뒤도는 순간, 오르페우스는 바로 알았을 겁니다. “우린 영원히 이별이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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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색>을 신화적 알레고리로 다시 읽어 봅니다.
'너무 간절해서 이루지 못한 사랑', 이 역설이 문학 수사만은 아닌 듯합니다. 돌아보니 간절한 마음에 조급하게 굴다 아주 놓친 것들이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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