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침묵, 재현, 기억...🙏 매달 마지막주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의 영화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는 여럿 있었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비극을 좀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영화사의 맥락에서 그 함의를 짚어 봅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자가 함께 읽어 볼 희곡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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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56년,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가 세상에 등장했다. 이 32분짜리 이미지로부터 세계는 ‘1940년대 아우슈비츠’라는 불가해한 시공간에서 벌어진 폭력을 목격했다. 레네의 이미지에 ‘서정’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레네는 빙 돌아가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폭력을 숨김없이 영화로 기록했다. 그것은 ‘정신’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진 폭력에 대한 반란이었고, 영화가 결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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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레네, <밤과 안개> 중에서. 홀로코스트가 벌어진 흑백 화면의 과거와 모든 것이 종결된 컬러 화면의 현재가 교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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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촛불은 아우슈비츠에서 꺼지고 말았다.”
-장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
1985년, 클로드 란츠만(Claude Lanzman)의 다큐멘터리 <쇼아(Shoah)>가 세상에 등장했다. 이 9시간 26분짜리 이미지로부터 세계는 ‘제2의 <밤과 안개>’가 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과 안개>는 1940년대 영화가 아우슈비츠를 외면했다는 사실로부터 탄생한 돌연변이였기 때문이다. <밤과 안개>의 이미지 대부분은 ‘영상’이 아닌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레이션이 이 사진들을 하나의 영화로 엮는다. 레네의 작업은 부재하는 이미지로부터 당시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애도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래서 란츠만은 <밤과 안개>와 달리 ‘폭력을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아우슈비츠를 기록하고자 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쇼아>는 아우슈비츠의 재현 불가능성을 영화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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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란츠만, <쇼아> 중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목격자, 홀로코스트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이들과의 인터뷰를 담았다. 히브리어로 ‘쇼아’는 ‘대재앙’, ‘참사’를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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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다르는 <쇼아>를 두고 “영화의 촛불은 아우슈비츠에서 꺼지고 말았다”며 크게 탄식했다. 이 탄식에 담긴 분노는 란츠만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1940년대 영화가 아우슈비츠를 외면했다는 사실, 즉 영화사 전체를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이는 고다르가 스스로를 영화 ‘안’의 존재가 아닌 영화 ‘옆’의 존재로 자각했다는 사실, 고다르가 영화사를 새롭게 쓰기 위해 <영화의 역사(들)(Histoire(s) du cinéma)>(1989~1998)을 세상에 공개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영화의 역사(들)>에서 정점에 이르는 ‘강제 수용소에 대한 영화의 책임’을 확립하기 위한 고다르의 노력”[질 머피(Jill Murphy), ≪고다르와 책(Reading with Jean-luc Godard)≫(2023)에서 인용]이 ‘불가능한 이미지’에 대한 ‘불가능한 향수’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영화사는 아우슈비츠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쇼아>는 피할 수 없는 이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세상에 아우슈비츠의 이미지는 없고, 애도를 위해선 모든 것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재현하는 대신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조너선 글레이저(Jonathan Glazer)의 극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2023)가 <쇼아> 미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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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종류의 어떤 ‘사랑’에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평생 아무나 ‘사랑한’ 적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오직’ 나의 친구들만 사랑하고, 내가 알고 믿는 단 하나의 사랑은 오직 ‘사람’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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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 포스터. 검은색 처리한 회스의 집 바깥 공간은 사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을 가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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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8월, 고다르는 ≪카이에뒤시네마≫의 한 기사에서 “수용소의 진정한 역사는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의 몸을 박멸하고 처분한 거대한 사업 속 고문자들과 캠프의 다른 노동자들의 일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정말 끔찍한 것은 그들의 공포가 아니라 그들의 아주 평범한 일상”이다(질 머피, ≪고다르와 책≫에서 인용).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다루는 것은 고다르가 지적한 바로 그 일상이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 루돌프 회스의 집과 수용소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결코 수용소를 비추지 않으며, 회스 일가의 평온한 일상에 집중한다.
하지만 왜인지 보이는 것은 멀게 느껴지고 보이지 않는 것은 가깝게 느껴진다. 평온한 화면으로 다 가려지지 않는 소리 때문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연출의 핵심은 화면 바깥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 이 힘을 예증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첫 장면, 약 3분의 암전이다. 이 암전 동안 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지만 분명 고통이 뒤섞인 소리를 듣는다. 이윽고 열리는 화면, 빛이 쏟아진다. 새가 지저귄다. 백색에 가까운 풀밭에서 아이들이 뛰논다. 이 두 화면의 몽타주는 아우슈비츠의 어둠과 회스 일가의 빛이라는 시각적 대조를 나타낼 뿐 아니라 앞으로 관객이 체험하게 될 청각과 시각 사이의 불화를 암시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포스터가 잘 보여 주듯 어둠으로부터 들려오는 외재음이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영화다.
앞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회스 일가의 평온한 일상에 집중한다”고 썼지만, 이 영화가 택한 ‘집중’이 철저한 거리 두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카메라 시점들을 돌이켜 보면 어딘가 수상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영화는 회스 일가를 주로 딥포커스나 롱숏으로 찍었으며, 인물이 카메라에 가까울 경우 인물이 결코 카메라를 알아차릴 수 없는 시점에서 대상을 찍는다. 보통 이런 기법은 관객과 대상 사이의 거리를 형성해 이미지를 관음증적으로 만들기 마련이며, 어떤 면에서 영화가 실제 폭력을 재현할 때 금기시되어야 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촬영 기법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한데, 영화가 재현하는 것은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회스 일가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폭력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오직 폭력의 주체만을 관음증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이 관음증에는 역설적으로 어떠한 스펙터클도 존재하지 않는다. 회스 일가의 일상에 끼어든 두 가지 교차 편집 때문이다. 하나는 앞서 소개한 외재음의 삽입이고, 다른 하나는 루돌프가 딸에게 읽어 주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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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 중에서.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이 장면은 루돌프가 딸에게 읽어 주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상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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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가까이서 들리는 총소리, 비명 등은 담벼락 너머 아우슈비츠의 참극을 예상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화면과 소리의 불화는 관객의 집중을 회스 일가 서사 바깥으로 옮겨 놓는다. 회스 일가의 그 어떤 갈등도, 애정도, 욕망도 관객의 정신을 붙잡아 놓을 수 없다. 관객에게 불가능한 참극에 대한 회스 일가의 무관심은 관객의 위치를 관음증 환자에서 이미지를 번역하는 번역자로 변모시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여기에 더해진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는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노역장에 먹을 것을 심어 놓는 한 폴란드 소녀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수용소와 회스의 집을 연결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열화상 카메라 이미지가 노역자들을 ‘살리는’ 소녀의 이미지이고, 루돌프의 목소리는 노역자들을 ‘죽이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다시 소리와 화면 사이 불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글레이저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기록하고자 했다. 이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아우슈비츠의 ‘없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던 란츠만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다른 새로운 시도다. 고다르와 란츠만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았다면 어떤 말을 남겼을지, 그들에게 영화의 촛불은 다시 타오를 수 있을지 너무나 묻고 싶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글레이저는 오늘날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전시된 피해자들의 신발 무더기를 푸티지 필름으로 삽입한다. 극영화의 연출에서 벗어난 이 이질적 장면 이후, 루돌프는 갑작스레 구토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 역시 ‘없는 이미지’로서 아우슈비츠가 루돌프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소환된 미래가 루돌프에게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고? 이 몽타주는 너무나 전형적이고, 우리를 쉽게 이 해석으로 이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영화는 관객의 수동성이 아닌 능동성을 요구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어둠은 언제나 ‘없는 이미지’였다. 보이는 것이 아닌, 영화 속 루돌프가 향하는 마지막 지점, 끝없는 어둠에 주목해 보자.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루돌프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발견하려는 것은 왜일까.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우리의 나쁜 버릇 때문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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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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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요르가의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침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악에 가담하고 마는 적십자 대표가 나옵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희곡에도 학살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없습니다. 수용소는 오히려 평화롭습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팽이를 치고 연인은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그곳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흉흉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파견된 적십자 대표가 보고서를 씁니다.
“나는 정상적인 도시를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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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적인 것은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않은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었다면 진실을 썼겠지요. 단어 하나, 표정 하나.
저는 썼습니다. “누구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이 취한 조치에 대해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이 보고서가 이 일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오늘 저는 이곳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썼던 내용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시 쓴다 해도 단어 하나하나, 그 내용 그대로 썼을 겁니다. 그리고 또 서명했을 겁니다. 저는 제가 본 것을 썼고, 그곳이 천국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날 저는 의약품 세 상자를 보냈습니다. _후안 마요르가, <천국으로 가는 길>, 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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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악의 평범성’을 다뤘다면 희곡은 ‘평범성의 악’을 보여 줍니다. 야만이 힘을 발휘하는 때와 곳에선 이성과 상식에 따른 판단, 행동도 ‘결과적’으로 ‘악’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더라면?” 무의미한 가정을 해 봅니다.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야만의 시대에는 무엇으로 보고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팽이 치는 아이들의 불안에 찬 눈빛,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떨리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다정함’으로 적십자 대표와는 다른 보고서를 쓰고 싶습니다.
“모든 게 비정상입니다. 시나리오는 엉성하고, 연기는 어설픕니다. 무엇보다 떨리는 눈빛, 목소리, 그걸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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