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의 카메라>, 카메라 든 마법사 이자벨 위페르💌
지난달 보내 드린 홍상수 영화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자유의 언덕>으로 본 홍상수 영화 세계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이번엔 <클레어의 카메라>입니다.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이 <클레어의 카메라>를 중심으로 홍상수 영화의 특징을 짚었습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자가 함께 읽어 볼 희곡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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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언덕>이 ‘편지 읽기’와 ‘꿈꾸기’를 통해 두 개 시간을 교차하며 인과적 시간을 돌파해 ‘모호함(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사랑)’을 획득한다면 <클레어의 카메라>(2016)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의 공간 이동, 사진 촬영을 통해 모호함을 획득한다. 클레어는 칸영화제에서 영화감독 완수(정진영), 영화사 사장 양혜(장미희), 영화사 직원 만희(김민희)를 만난다. 이 과정에는 클레어의 사진 촬영이 적극 개입한다. 클레어는 총 여덟 번 사진을 찍는데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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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당, 완수를 촬영. (숏 15) 2) 식당, 양혜를 촬영. (숏 15) 3) 해변, 앉아 있는 만희를 촬영. (숏 17) 4) 만희의 숙소, 만희의 남자 후배(강태우)를 촬영. (숏 21) 5) 만희의 숙소, 담배 피우는 만희를 촬영. (숏 21) 6) 파티장, 혼자 울고 있는 만희를 촬영. (숏 25) 7) 만희가 양혜에게 해고를 통보받은 카페, 개를 촬영. (숏 26) 8) 만희가 양혜에게 해고를 통보받은 카페, 만희와 테이블을 촬영. (숏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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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클레어의 카메라> 장면. 클레어가 찍은 사진을 보는 만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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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의 촬영은 영화 전체 인과를 흐트러트린다는 인상을 준다. 5)와 6) 사이, 숏 22에서 클레어가 코트다쥐르 해변의 굴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인과의 붕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숏 직후 숏 23~25 파티장 신에서 클레어가 촬영한 만희는 혼자 울고 있는 ‘슬픈’ 모습인데, 숏 15에서 만희가 “인기가 많고 행복해 보였다”고 한 클레어의 설명과 완전히 대치되기 때문이다. 클레어의 설명은 오히려 숏 21에서 담배를 피우며 활짝 웃는 만희와 가깝다. 또 이 설명대로라면 숏 15의 시간 배경은 숏 25 뒤에 와야 옳다. 그렇다면 중간에 포함된 이 인서트 숏의 굴은 클레어가 인과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마법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공간에 대한 암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클레어의 촬영은 어떤 의미일까? 클레어는 숏 15에서 완수를 찍으며 “사진을 찍기 전과 후에 당신은 다르다”라고 주장한다. 클레어의 여덟 번의 촬영이 시퀀스 배치를 바꿀 뿐 아니라 서사를 바꾸는 변곡점임을 뒷받침하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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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클레어의 카메라> 장면. 만희는 해고를 통보받았던 카페에서 클레어와 대화를 나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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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의 변곡점을 통해 <클레어의 카메라>는 어떤 결과를 맞이할까? 변곡점들은 영화 형식과 캐릭터들의 관계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영화 전체를 놓고 봤을 때 클레어의 촬영은 각 시퀀스를 길게 늘어뜨린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총 32개 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롱테이크 숏을 선호하는 홍상수의 성향을 고려하더라도 적다. 이런 구성의 특징은 숏 26, 만희와 클레어가 카페에 도착한 장면의 롱테이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카메라가 도로에서 카페로 걸어오는 만희와 클레어를 찍은 다음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클레어를 따라갔다가 다시 만희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온다. 이때 카페 밖 클레어의 공백은 숏 5에서 양혜가 만희에게 해고를 통보했던 상황의 목소리로 채워진다. 만희와 클레어가 서 있는 공간이 분리된 순간에도 숏은 분할되지 않는다. 이후 카페 주인의 개를 데리고 되돌아온 클레어는 차분히 7)과 8)의 촬영을 수행한다. 이 장면은 클레어의 촬영 때문에 길어진다. 촬영 시간 ‘획득’으로 만희와 관객은 숏 5의 사건(양혜가 만희를 해고한)을 다른 각도로 파악하게 된다. 내레이션은 물론 숏 5의 양혜와 만희 목소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만희가 테이블에 앉으면서 만희의 목소리는 숏 5의 목소리가 아니라 양혜의 내레이션에 맞서는 현 시점의 목소리로 바뀐다. 이 숏은 사건을 재현하는 대신 만희가 상황 속에 ‘거주’하게 만든다. 롱테이크는 이 ‘거주’를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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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의 카메라>는 클레어의 촬영 자체로 결말을 결정하는 영화다. 숏 26에서 “사진을 왜 찍느냐”는 만희의 질문에 클레어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클레어의 촬영이 대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대상 안에 거주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클레어의 발언은 클레어가 촬영을 통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자 <클레어의 카메라>가 구성된 방식 자체이기도 하다. 숏 27은 완수가 열린 창문을 향해 누워 있고 창밖으로 기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장면이다. 매우 짧고 동적이다. 숏 26(카페 장면)의 정적인 롱테이크와 전면 대치한다. 이 숏은 결국 완수가 클레어의 세계관과 융화될 수 없는 인물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완수를 클레어의 세계관에서 배격함으로써 만희와 클레어의 연대 가능성을 영화적 마법을 통해 제시한다.
클레어가 만들어 내는 모호함은 클레어와 만희를 지속 연결한다. 이 연결은 클레어가 숏 25에서 촬영한 만희의 슬픈 모습이 완수와 양혜 앞에서 부정됨으로써 시작되며, 마지막 장면에서 만희가 짐을 챙기는 장면이 정지 화면*으로 제시됨으로써 결실을 맺는다. 홍상수의 작법을 놓고 보자면 <하하하>(2008) 이후 처음, 특히 엔딩으로는 처음이다. 이 갑작스러운 정지는 클레어가 말한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행위’에 상응하며, 마지막 숏의 촬영 장소가 숏 1에서 만희가 양혜의 부름을 받아 나가던 사무실이라는 것과도 관련 있다. 마지막 숏이 시작될 때 카메라 구도는 숏 1과 다르며, 만희가 짐을 챙기는 장면이 클로즈업되어 있어 그곳이 첫 숏의 사무실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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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말한 "정지 화면"은 "프리즈 프레임 숏(freeze-frame shot)"을 말합니다. 하나의 프레임을 여러 번 인화해 화면을 정지 상태로 보이게 합니다. 디지털 영화에선 특정 프레임을 정지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장면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이를 담은 마지막 장면이 대표 사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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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만희가 서류를 챙길 때 카메라는 살짝 위치를 바꿔 숏 1의 구도를 회복한다. 이때 영화는 프레임 운동을 멈추고 사건을 종결하는데, 테이블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만희의 모습은 고정되어 이후에 만희가 방을 나갈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된다. 또한 이 장면에서 만희가 입은 옷이 숏 1과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에 마지막 숏의 시점이 모호해진다. 마지막에 숏 1의 상황을 반복하면서 맨 처음 만희가 양혜의 부름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모호하게 만들어 만희를 “부정직하다”는 불합리한 이유로 해고하려는 양혜의 통보로부터 구출한다. 알튀세르가 말한 호명(interpellation)에 해당하는 양혜의 이데올로기적 부름에 대한 거부다. 이 영화의 멈춤에는 클레어의 촬영이 개입되지 않지만 관객이 만희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된다는 점에서 클레어의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영화 서사의 행위자인 만희와 서사를 재구성하는 마법사 클레어의 연대를 통해 오직 영화 언어로만 구축 가능한 해피엔드를 맞이한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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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클레어의 카메라> 장면. 화면 왼쪽에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포스터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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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언덕>과 <클레어의 카메라>는 영화 행위자들의 지향적 지각 행위를 따라 인과적 해석을 배제하고 모호함을 선택함으로써 긍정적 인물상을 그린다. 초기작에서는 모리, 클레어, 만희와 같은 긍정적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성에 따른 관계 설정은 절대적인 것으로, 특히 남성적 힘은 개인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백종학)이 지숙(오윤홍)에게 구강성교를 강요하는 장면이나 <오! 수정>에서 재훈이 수정과 성관계 후 피의 흔적을 확인하는 장면은 성에 따른 권력 관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전형적인 이성애 관계에서만 가능한 상황을 통해 성기에 담긴 은유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 충실하다. 그러나 <극장전> 이후 노골적 성관계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관, 여자의 집 등 장소적 암시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성 구분은 흐려지고 섹슈얼리티는 ‘비본질’로 전환한다. 섹슈얼리티는 보다 개별적으로, 또 맥락 차원에서 접근된다. 홍상수 영화가 ‘마법사’를 통해 초현실주의와의 접점을 만들고 있으며 모호한 서사 구조로 섹슈얼리티의 절대성을 밀어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은 <해변의 여인>과 <클레어의 카메라> 비교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해변의 여인>은 중래를 상대로 한 문숙과 선희의 연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클레어의 카메라>의 인물 구도를 일찍이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해변의 여인>의 갈등은 <클레어의 카메라>와는 달리 성행위 여부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맥락보다는 성기 자체에 집중한 양상이다. 또한 <클레어의 카메라>에는 <해변의 여인>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적 남성 인물’인 만희의 남자 후배가 나온다. 따라서 모리를 필두로 홍상수 영화에 등장한 새로운 남성상은 성의 비본질성을 강조하며, 지정성별을 넘어선 새로운 젠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 영화학자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은 “할리우드 관습을 벗어난 영화에서 ‘일탈적인’ 남성성들이 발견되며, (…) 그중 일부는 권력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자세, 즉 모든 주체성의 조건 및 용어와 화해하고 전통적으로 ‘여성적으로’ 여겨진 것과 화해하는 자세를 보인다”고 말한다. 이는 홍상수 후기작에 등장하는 일부 남성의 특징과 일치한다. 특히 <당신 자신과 자신의 것>의 영수가 그런데, 영수는 호명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민정과 사실상 이별할 때 다리를 다쳐 일종의 일탈적(불구적) 상황을 경험하게 되며 결국 민정에게 굴복하고 타자로서 민정을 인정하며 무릎 꿇고 사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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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공개된 후 쓴 평론에서 “홍상수 영화를 보고 울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영화를 크게 잘못 본 것이다”라며 “홍상수는 사랑이 숭고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글이 쓰인 2004년을 기준으로 본다면 매우 명확한 분석이다. 하지만 이 분석은 홍상수 영화의 초현실성이 점차 섹슈얼리티를 구석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해석의 모호함을 배치한 2018년을 기준으로 힘을 잃는다. ‘사랑을 믿지 않는 태도’는 홍상수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재현적 사고에 이끌리는 영화 속 몇몇 인물들의 태도에 가깝다. 후기작의 초현실성은 홍상수를 더 이상 냉소주의자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홍상수는 행위자를 통한 마법을 끊임없이 실험하며 메를로퐁티가 말한 “세계-로의-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듯 보인다. 부뉴엘이 초현실성을 통해 성취하고자 한 것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의식이었던 것을 떠올려 보자. 부뉴엘과 홍상수 모두 초현실주의가 만들어 내는 모호함이라는 마법을 활용해 ‘지배 논리’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재현적인 사고에 대항하는 실험가라고 평하고 싶다. 홍상수의 끝없는 실험 정신은 1996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스물두 편의 장편을 촬영한 놀라운 다산성으로도 드러난다. 프루동이 지적했듯 이 놀라운 속도는 “위대한 예술가가 지닌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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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클레어의 카메라> 장면. 만희가 마구 자른 천 조각을 어루만지는 클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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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의 카메라>가 감동적인 것은 지향적 세계관, 지향적 세계관으로 쓰인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홍상수의 간절한 믿음 때문이다. 숏 30에서 “세상이 너무 짜증 나서” 천을 마구잡이로 자른다는 만희에게 클레어는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말하며 천 조각을 머리 그리고 가슴에 대어 본다. 만희의 세계가 아무리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더라도 클레어의 지향적 해석을 통해 충만한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단순히 만희와 클레어의 관계에만 존재하는 감동이 아니다. 마구 흐트러진 천 조각처럼 홍상수는 서사 단위인 숏을 마구 흐트러트린다. 그 결과 발생하는 모호함은 관객이 가져갈 새로운 의미다. 홍상수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인과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깨고 어떤 해방감을 선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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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의 카메라>의 구조와 서사를 바꾸는 클레어를 두고 프루동은 농담처럼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를 살짝 바꿔 “기계 여신(déesse ex machina)”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홍상수와 줄곧 비교되어 온 로메르 대신 신학적 주제를 다뤄 온 스웨덴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과의 비교 가능성을 제시한다. 프루동 주장처럼 홍상수 영화에서 어떤 신학적 징후가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후>를 생각하면 이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그 후>는 홍상수가 처음으로 ‘신’을 내세운 영화다. 흑백 영화로서 <그 후>가 지닌 시니컬함, 주인공 아름(김민희)이 겪는 고독과 생활의 고통, 마지막 숏 이전까지 단 한 명의 엑스트라도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인간적 분위기를 제거한 건조한 새벽의 배경은 아름을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름’으로 짓다니!). 이 순간 홍상수는 신을 소환한다. 아름은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과의 대화에서 “저는 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절대로 아니라는 걸. 그리고 둘째로는 언제 죽어도 된다는 걸 믿어요. 정말로 괜찮다는 걸 믿어요. 셋째로는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게 다 사실은 아름다운 것일 거라는 걸 믿어요. 영원히. 이 세상을 믿어요”라며 ‘믿음’을 자신의 존재 양식으로 세운다. 신을 믿는 아름은 모든 고통을 떠안은 상황에서 신에게 기도하는데, 해고당해 돌아가는 택시에서 눈 내리는 하늘을 비집고 내리쬐는 빛을 보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웃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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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그 후> 장면. 수많은 고통에도 눈 내리는 하늘을 보며 웃는 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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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할 것 없이 숭고(sublime)다. 이 숭고는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향한다. 홍상수 영화의 초현실성이 ‘실재적 행위자’를 통해 획득된다는 주장에서 다소 어긋난다. 하지만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홍상수 영화가 여전히 비인과적인 것에 주목하고, 초현실성을 획득하고, 재현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그 후>의 비인과적 시간은 아름이 처한 상황과는 별개로 봉완이 듣는 환청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통해 영화의 모든 비인과성을 설명하는 건 무리한 해석일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홍상수 영화에 신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충격이고 새로운 사건이다. 이 변화가 홍상수 필모그래피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시발점이 될지 단발적 사건이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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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2018년 생강의 기록이다. 2024년 개봉한 <여행자의 필요>의 ‘이리스’를 보며 홍상수 영화에서 ‘마법사의 필요’를 다시금 통감했고, 오래전 쓴 이 글을 다시금 매만지게 되었다. 아쉽게도 2018년 이후 홍상수에 대한 기록을 갱신하지 못했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시도해 볼 생각이다. 마법사는 비단 홍상수 영화 속 인물에만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아니다. 영화나 연극을 보며 마법 같은 순간을 느낀 적이 있다면 내게도 나눠 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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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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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얼마 전 마법 같은 순간을 체험했습니다. 연극 <연안 지대>를 보고서입니다.
이 연극을 본 관객은 둘 중 하나 아닐까요? 희곡을 읽고 연극을 봤거나, 연극을 보고 희곡을 읽(을 예정이)거나. 저는 희곡을 먼저 읽은 쪽입니다.
사실 희곡 편집자라는 직업상 대개 희곡을 읽고 연극을 보게 됩니다. 머릿속으로 그려 온 장면이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은 얼마나 경이로운지요. 진짜 마법입니다. 연극 <연안 지대>는 첫 장면부터 너무나 강력한 마법으로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윌프리드가 걸어나와 “따르릉여보세요와주세요아버지가돌아가셨어요” 내뱉은 그 순간 바로! 이어질 장면들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희곡이 충분히 초현실적이라 읽으면서 이게 과연 어떻게 무대화될까 늘 궁금했습니다. 잦은 플래시백, 환상 속 기사의 등장, 갑작스런 영화 장면. 이 모든 걸 무대에서? (가능했습니다.) 그걸 내가 몰입해서? (가능했습니다.)
윌프리드는 전쟁과 동떨어져 살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떠메고 전쟁이 한창인, 온 땅이 무덤인 아버지의 고향에 떨어졌습니다. 아버지를 묻기 위해서요. 그곳에서 전쟁의 참상을 봅니다. 그걸 윌프리드가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와즈디 무아와드는 망명 이후 고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에 몹시 부채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화염>, <숲>, <연안 지대> 같은 전쟁 비극이 바로 그 부채감에서 탄생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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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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