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우연에 대해 말씀하시니 저는 반대로 철저히 계산된 장면 하나가 떠올라요. 처음 트레일러 영상을 봤을 때부터 기억에 남던 장면인데요,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처음 학교에 갔을 때, 아이들이 “다루마상가 고론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아이들의 정지 모션을 카메라가 쭉 트래킹하는데, 이 정지 모션이 놀이라는 사실은 트래킹 숏이 끝날 즈음에야 드러나요. 기이해 보일 수밖에 없게 연출했죠.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삽입된 음악을 포함해 이 장면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공포’를 연출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에서 정지 모션이 두드러지는 장면이 딱 두 개였거든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장면,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에서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사슴과 하나를 마주하는 장면이요.
세정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제목은 시나리오 헌팅 단계에서 떠오른 것일 뿐 큰 의미는 없다고 말한 바 있어요. 하지만 영화를 다 본 관객 입장에선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제목인데요, 생강 님은 제목에서 무얼 떠올렸나요?
생강 거의 철학적 명제처럼 들리는 도발적이고 선언적인 제목이지만 정작 영화는 그 무엇도 선언하지 않지 않았나요? 선언한 것이 있다면 “난 잘 모르겠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하마구치 감독의 이전 작들이 ‘인간’을 가운데 놓고 ‘자연’을 배경으로 찍었다면 이 영화는 ‘자연’을 가운데 놓고 ‘인간’을 배경으로 찍었으니 그럴 만도 해요. 그래서 저는 하마구치 감독의 발언이 굉장히 솔직하다고 생각해요. 머릿속에 이미 떠오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건 창작자에게 떠오른 이상 지울 수 없는 흔적일 테니 그대로 가야죠. 그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는 영화 논리에 맡길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래서 제목이 마음에 들어요. 비약이긴 하지만 이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면 밤의 숲속을 걷는 마지막 트래킹 숏의 모호함이 하마구치 감독이 자신이 본 것에 솔직하기 위해 택한 장면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제목에 악센트를 넣어서 읽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요.
세정 배우의 입을 빌려 직접 ‘자연의 보존과 파괴의 균형’을 말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의 생태주의 관점을 엿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영화가 환경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제안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생강 생태주의 관점이라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주제를 그럴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표현했으니까요. 하지만 감독이 정말 어떤 제안을 던졌다고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앞서 말했지만 하마구치 감독의 입장은 “난 잘 모르겠다”처럼 보여서요. 다만 한 가지 할 수 있는 말은, 이전까지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서 자연이 인간의 관점에서 본 ‘재난’으로 등장했다면(특히 <아사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인간의 눈을 거치지 않고 직접 관객에게 대화를 건다는 거예요. 하마구치 감독이 영화에 생태주의 시선을 담는 새로운 방법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전에 대화 나누다가 세정 님이 이 영화에 ‘거짓’을 말하는 숏들이 있다고 한 게 기억에 남아요. 어떤 숏들이었는지, 그게 세정 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세정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잊었을 때 어김없이 들리는 총성, 사라진 하나를 찾을 때 보이는 나무에 맺힌 피는 우리에게 하나의 죽음을 환기시켜요. 결말에 이르러 총과 피와 하나의 죽음이 느슨하게 결합하긴 해요.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타쿠미가 데리러 오는 것을 잊었을 때 발포된 총에 맞았다’, ‘사라진 하나를 찾을 때 보인 나무에 맺힌 피는 하나의 것이다’ 두 명제는 거짓처럼 보여요. 총성-피-하나의 결합은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 볼 수도 있고 현실과는 다른 논리를 따르는 영화적 진실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둘 다일 수도 있고요. 하마구치가 ‘거짓’과 ‘진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긴 하지만 영화 문법 차원에서 거짓을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거든요. 평소와 전혀 다른 스타일로 차려입은 애인을 보는 기분이었어요. (농담입니다⋯.)
생강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다이얼로그가 돋보이는 장면으로 글램핑 사업 설명회 장면과 화상회의 장면, 차 안에서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대화하는 장면 정도가 떠오르는데요,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나요?
세정 대사보다는 침묵이 기억에 남아요. 침묵도 말이라는 상투적인 말도 있잖아요. 타쿠미, 타카하시, 마유즈미 세 사람이 차 안에서 사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측 인물들은 여전히 글램핑장을 짓는 데 거부감이 없어요. 타쿠미는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묻고 타카하시는 “다른 곳으로 가겠죠” 답해요. 타쿠미가 말없이 담배를 뭅니다.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 있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어요. 다른 차내 대화 장면에서 타카하시가 마유즈미에게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묻는 장면과 대비도 되고요. 소리 이야기를 하니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음악 감독이었던 이시바시 에이코가 공연용 비디오아트를 의뢰한 것에서 출발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인지 음악이나 사운드가 흥미로운 장면이 많은데요. 생강 님은 이 영화에서 사운드 활용이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었나요?
생강 세정 님이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가 ‘침묵도 말’이라는 사실을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음악에서도 보여 줬다고 생각해요. 외재음으로서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악과 내재음으로서 자연의 소리 사이 ‘단절’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출의 핵심이라고 느꼈어요. 영화의 배경 마을은 아주 조용한 곳입니다. 음악이 개입하면 오직 음악 소리만이 모든 것을 채울 정도로요. 만약 이 음악들이 숏의 배치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시작하고 끊겼다면 자연의 침묵은 그저 침묵으로 남았을 겁니다. 그런데 음악의 갑작스러운 종료, 단절로 자연의 침묵은 ‘자연이 하는 말’로 되살아나죠. 주제에 걸맞은 좋은 사운드 활용이라고 생각해요. 한 가지 더 물어볼게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하나의 실종 앞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하죠. 마유즈미는 오두막에 남고, 타카하시는 타쿠미를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타쿠미는 자신을 따라나선 타카하시를 손수 ‘처단’하는데요, 이 마지막 시퀀스의 인과는 불명확하지만 영화가 마유즈미를 살리고 타카하시를 죽인 ‘선택’에는 나름 파악 가능한 인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나요?
세정 마지막 시퀀스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자연에 개입해 균형을 깨트린 인간이 자연의 앙갚음을 당했다고 보는 거예요. 다른 해석도 가능할 거예요. 마지막 시퀀스는 ‘진실’도 ‘거짓’도 아닌 듯 모호해요. 분명히 더 ‘자연스러운’ 연출이 있어요. 타쿠미가 살의를 품는 계기가 되는 사건을 보여 줄 수도 있었고, 마지막 시퀀스를 아예 환상처럼 그릴 수도 있었죠. 이 영화는 현실처럼 보이기를 포기한 것 같아요. 대신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고 방아쇠를 당긴 총이 격발하는 것처럼, 영화 자신의 논리에 따라 불가피하게 그런 결말에 다다른 거죠.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조금 더 고민해 보고 싶어요. 질문에서 영화를 주어에 놓은 것, 인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