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베어스> 자파르 파나히 감독에게 부치는 편지📧
영화, 연극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사는 얘기 같지만 그와 닮았을 뿐 꼭 같지는 않습니다. 예술이 이 지점에서 나고 갈라집니다. ‘모방’.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생강’이 <노 베어스> 자파르 파나히 감독에게 부치는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영화의 존재론을 탐구한 영화 같습니다. 연극의 존재론도 여기서 별로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지만지드라마 편집자가 (답장하는 척) 함께 읽어 볼 희곡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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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베어스>를 보고 제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 <노 베어스>의 결말을 두고 떠올린 말이 아닙니다. 이 편지는 <노 베어스>에 부치는 것이 아니라 감독님에게 부치는 것이니까, 이렇게 다시 말해야겠습니다.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관을 나와 머릿속에서 다시 상영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노 베어스>는 좋은 영화일 리 없습니다. 감독님은 영화에 두 번의 죽음(자라의 죽음, 구잘과 솔두즈의 죽음)을 담으셨죠. 이 죽음은 곧 <노 베어스>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감독님께서 영화 속 두 번째 죽음을 마주한 순간 차를 멈추고는 영화를 그 자리에서 끝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노 베어스>는 제 머릿속에서 더 이상 상영되지를 않습니다. 대신 제 머릿속에서 상영되는 것은 파나히 감독님 바로 당신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좌절감이겠지요. 마치 영화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좌절감, 그것이 이 영화가 제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그런 저에게 이 영화의 좋고 나쁨에 대해 논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파나히 감독님,
<노 베어스>가 어떤 영화인지는 제가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김병규 평론가의 글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를 읽으면 되니까요. 김병규 평론가의 말대로 이 영화는 “증인”을 요구합니다. 거짓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오직 증인의 증언으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 베어스>의 증인으로서, 이 영화가 끌어안은 세 가지 좌절감에 대해 조금 더 말하고 싶습니다. 결박(結縛)의 좌절, 존재의 좌절, 그리고 예술의 좌절에 대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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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베어스>에서 감독님은 떠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정된 채 360도 패닝하는 오프닝 시퀀스의 카메라를 떠올려 볼까요. 이 카메라는 영화 속 영화인 박티아르와 자라의 세계가 ‘거짓’임을 증명하지요. 동시에 이 카메라의 고정성은 감독님의 몸이 놓인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터키와 이란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는 불안하기만 하고, 당신은 저 너머의 세상을 쳐다보지만 편집하지 못합니다. 결박된 몸이 만든 좌절, 그리고 그것은 뒤이어 자라의 시신으로 가시화됩니다. 바닷가로 향하는 박티아르, 자라의 죽음을 확인하는 박티아르. 저는 당신이 이 장면을 영화에 시각화할 거라고 감히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노 베어스>가 좇는 것이 진실이었다면 이 장면은 금기였을 테니까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감독님에게 결박의 좌절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뿐이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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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감독님을 응시하는 동시에 <노 베어스>를 보는 관객을 응시합니다. 감독님의 좌절이 우리에게도 새겨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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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감독님의 몸이 한 장소에 묶여 있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감독님은 <노 베어스>를 두 장소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픽션으로 구성하셨죠. 하나가 앞서 말씀드린 박투아르와 자라의 픽션 세계라면, 다른 하나는 스크린 속 감독님이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있는 픽션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좌절은 가히 ‘존재의 좌절’이라 부를 만합니다. 모든 혼란과 고통이 감독님의 존재 때문에 발생하니까요. 하지만 왜일까요? 감독님께는 모든 혼란과 고통을 잠재울 방법, 구잘과 솔두즈를 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구잘과 솔두즈를 찍은 사진을 공개하는 방법 말이죠.
그 사진은 영화 속 수많은 증언들로 ‘존재’하지만, 화면에서는 ‘부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진이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맹세의 방’에서 당신이 취한 태도, 즉 영화가 ‘진실’을 증언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화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존재가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이 <노 베어스>의 세계라면, 감독님께서는 영화가 그 사진의 존재 유무를 밝히는 것 자체가 기만이라고 생각하신 거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노 베어스>에 존재하는, 가시화된 모든 죽음은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스크린 속 감독님의 육체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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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의 방에서 카메라의 무용을 주장하는 야곱. 그 앞에서 감독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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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노 베어스>는 ‘거짓’입니다. <노 베어스>에 곰이 없는 것처럼, <노 베어스>에는 결박도, 존재도 없습니다. 이 영화가 만약 진실에 대한 탐구라면, 감독님은 그것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 채 영화를 찍기 시작하신 셈이죠. 그래서 저에게 이 영화는 예술의 좌절, 나아가 예술의 절대적 무력감에 대한 극단적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좌절감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테니까요. 감독님의 좌절감을 우리가 보고 이야기하길 바라셨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노 베어스>를 보았고, 이렇게 글을 씁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지금 <노 베어스>가 아니라 자파르 파나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파나히 감독님,
스크린 밖, 당신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 증언이 들리십니까? <노 베어스> 속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 자파르 파나히 영화의 마지막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거짓에 불과하니까요. 감독님, 당신은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당신의 영화가 ‘진실’을 내뿜는 순간을 다시 보여 주세요. 제 머릿속에 당신의 영화가 다시 상영되기를 간곡히 바라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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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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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님, 영화에서 세 가지 좌절을 봤다고 했죠, 그 좌절로부터 세 편의 희곡을 떠올렸습니다.
결박
남지도 떠나지도 못하고 국경에 몸이 매여 버린 파나히 감독의 처지는 안타깝습니다. 호르바트의 <우왕좌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태어난 곳에서도 살아온 곳에서도 입국을 거부당한 ‘하블리체크’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양국 경계인 다리에 터를 잡습니다. 호르바트 자신의 처지이기도 했습니다. 웃기고 슬픈 일입니다. 국경처럼 실재하지도 않는 어떤 ‘선(線)’이 인간 실존을 결정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는 게요. 자주 잊습니다. 내가 그 경계에서 실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걸. 그걸 일깨우는 게 영화, 연극, 예술인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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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이 없어진 하블리체크는 다리 위에 몸을 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Hin und Her>(2015), Ödön von Horváth, Schauspiel Frankfu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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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것, 반대로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 영화 제목을 들었을 때 곧바로 이강백의 <파수꾼>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에서도 희곡에서도 권력은 공포를 조장해 주민들을 통제합니다. 영화에서는 ‘곰’이, 희곡에서는 ‘늑대’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정말 아무도 몰랐을까요? 곰이나 늑대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어느 땐 허상이 진실보다 더 큰 힘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아니, 진실이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허상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진실을 주시하게 하는 것, 그게 또 영화, 연극, 예술인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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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파나히 감독에게 도달해야 할 이 편지를 중도에 먼저 열어 보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희곡은 이 편지를 읽고 떠올린 겁니다.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입니다. 배우가 ‘영화’를 찍는 순간에서 빠져나와 느닷없이 카메라 정면을 향해 불평하는 ‘현실’ 장면은 역설적으로 “그래, 이건 영화야”라고 알려 주는 듯했습니다. 네, 제가 본 건 영화였습니다. 가상과 현실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그 구분을 모호하게 했지만 분명 온전한 ‘사실’이 아니라 적당히 ‘허구’인 영화요. 좀 색다른 영화인 건 분명했습니다. 몰입하려는 순간마다 나를 흔들어 깨우며 “이건 영화라고!” 소리쳤으니까요. 50여 년 전 브레히트가 서사극으로 연극에서 이루려던 것과 얼마나 닮았는지요. 깨어 있는 의식으로 현실을 마주하라고 하는 것, 그게 파나히 감독의 영화, 브레히트의 연극이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편지가 파나히 감독에게 잘 전달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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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레터는? 아론 소킨이 캐릭터 약력 만드는 법을 알려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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