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초등학생 미나토가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머니 사오리는 미나토를 추궁해 미나토의 담임 교사인 호리 선생이 이상 행동의 원인이라고 확신한다. 카메라는 사오리를 추적하며 호리 선생이라는 ‘원인’이 학교에서 제거되는 장면을 담는다. 이후 카메라는 호리 선생을 추적한다. 영화는 그가 비록 “남자답게”를 입에 달고 사는 고지식하고 답답한 인간이더라도 담임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성심성의껏 변호한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미나토와 요리의 사랑으로 만든 하나의 유토피아(이자 아지트)를 비춘다. 이는 사오리나 호리처럼 성장한 어른의 의심 가득한 눈으로는 담을 수 없는 절경이다. 이 진실 앞에서 관객의 의심은 무색해진다. 이처럼 <괴물>은 하나의 서사를 세 가지 관점에서 조명하고 관객의 인식을 뒤튼다. 혹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세 가지 진술로 진실을 지우는 영화라면, <괴물>은 세 가지 진술로 진실을 만드는 영화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 해석으로 <괴물>의 감상을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물음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극장을 나와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아이의 성장을 다룬 소설을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이라 한다. 아이는 일련의 사건을 경유해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이해하고 끝내 그것을 받아들인다. 현실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성장의 의미다. 만약 성장의 의미를 이렇게 한정한다면, <괴물>은 철저히 반(反)성장적인 영화다. 아이들에게 돌아갈 현실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미나토와 요리는 폭우가 내린 뒤 무너진 둘만의 아지트에서 탈출해 이렇게 말한다.
요리: 우리는 다시 태어난 걸까? 미나토: 아니, 그대로야.
그런데 이 대사를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두 아이가 현실이 아닌 숲으로, 그들에게 단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는 기찻길[영화는 이 장면에 한참 앞서서 철창으로 막힌 기찻길을 미나토(또는 요리)의 1인칭 시점으로 응시했다]로 질주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장면은 미나토와 요리의 미래를 어디에 위치시키는 걸까? 이 장면은 진실일까, 환상일까?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장면은 진실일까, 환상일까?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한없이 밝은 섬광을 기준 삼아 두 개의 숏으로 쪼개진 이 장면은 섬광과 질주라는 해방감이 선사하는 극단적 아름다움 때문에 앞선 세 번의 내러티브와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아니, 그렇게 보이기로 작정한 것만 같다. 두 아이를 현실로 돌려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최선, <어느 가족>
물론 <괴물>의 현실은 잔인하지만 악(惡)하지 않다. 사오리는 싱글맘으로서, 호리 선생은 학생의 보호자로서, 교장은 학교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수호자로서 ‘인간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두 아이가 기찻길이 아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결말을 기대해야 할까?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관객이 사건의 진실을 깨달았다고 느낀 순간, 영화는 이미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나는 <괴물>을 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영화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최선으로는 현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아픈 상처를 되새기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영화적 교훈이 아니라 사회과학적 교훈(이 글에서 쓴 “인간의 최선”이라는 표현을 “제도”로 바꿔도 뜻이 통할 것 같다)이고, 고레에다의 전작 <어느 가족>이 남긴 교훈이다. <어느 가족>에서 (유사) 자녀를 떠나보내고 경찰의 취조를 받는 안도 사쿠라의 얼굴을 상기해 보자. 완전히 소진된 인간의 얼굴에서 발견되는 것은 인간의 최선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뿐이다.
완전히 소진된 인간의 얼굴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력감뿐이다.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
영화의 최선, <괴물>
인간의 최선이 실패하는 모습을 응시하는 <괴물>은 <어느 가족>의 무력감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하다. 하지만 <괴물>은 다른 결말을 향한다. 미나토의 말대로, 아이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현실은 그대로다. 그래서 아이들은 현실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이들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을 향해 간다. 성장 서사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퇴행적으로까지 여겨질 이 결말은 이미 망해 버린 <괴물> 속 현실을 바꾸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최선이다. <괴물>은 내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대적 무력감을 이겨내는 힘은 진실이 아니라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하다. 세상이 이미 망했다면 예술로 도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도피는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다. 질주하는 미나토와 요리의 해맑은 미소를 떠올리며, 그렇게 믿어 본다.
written by 생강
생강
커뮤니케이션북스 편집자.
하루에 여덟 시간은 활자를 편집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영화의 힘을 긍정하고 쓰기를 즐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