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을린 사랑>에 이어 <숲>도 보셨다면? 지난달 대학로에서 와즈디 무아와드의 <숲>이 우리말로 초연되었습니다. 연극 <그을린 사랑>( 원작 <화염>)으로 익숙한 작가입니다. 두 연극을 모두 보신 분들은 주제, 대사, 표현, 전개 방식이 아주 유사하다는 걸 눈치채셨을 거예요.
무아와드는 2006년 아비뇽 연극제에서 <연안 지대>, <화염>, <숲>을 엮어 11시간 공연으로 제작했습니다. 여기에 <하늘>이란 작품을 더해 “약속의 피” 사부작이라 부릅니다. 방대한 세계관입니다.
무대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가능했을까요? “약속의 피” 프로젝트를 주제로 한 무아와드의 인터뷰에서 단서를 찾아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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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지대>, <화염>, <숲>, <하늘>(출간 예정) 네 편을 함께 선보이려 하는 이유가 뭐죠?
WM 네 편의 희곡은 서사가 중요합니다. <하늘>을 구상하던 어느 날, <연안 지대>, <화염> 그리고 <숲> 창작팀을 한자리에 모으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꿈같은 아이디어는 사실 비현실적이죠. 네 작품을 무대화하며 겪은 모험은 내 인생에서 무척 중요했습니다. 내 연극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그래서 이 네 편이 만나고 교차하길 바랐습니다.
<연안 지대>를 쓸 때부터 연작을 고려했나요?WM 아니요. <화염> 이후입니다. <연안 지대>는 여행을 끝내고 좀 헤매고 있던 친구 부탁으로 썼습니다. 그 친구는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 했는데, 그때 정작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고민이 만나는 이야기를 생각했고, 우리와 함께해 줄 동료들에게 연락했죠.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9개월간 연습했습니다. 첫 공연으로 제작비를 충당할 수는 있었지만 두 번째 공연을 하기엔 부족했어요. 그래서 <꿈(Dreams)>을 썼습니다. <연안 지대>를 좋아해 준 사람들에겐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로베르 르파주*는 몇 번의 성공 이후 후속 작업에서 비평가들로부터 “로베르 르파주는 죽었다”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한 번은 죽어야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나 역시 이 무서운 순간을 겪으며 교훈을 얻었습니다. 더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선 공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화염>을 완성한 뒤 내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일 극장을 찾기까지 4년이 걸렸습니다. 몇 주간 작업을 하다 보니 마치 <연안 지대 2>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실제로 <화염>이 연작의 두 번째 파트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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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르파주(Robert Lepage). '무대 위의 마법사'로 불리는 캐나다 출신 천재 연출가. 2015년 대표작 <바늘과 아편>을 가지고 내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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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독일과 프랑스가 두 번째 이라크 침공에 동참하지 않기로 한 무렵, 오래된 사진을 보게 됐어요. 독일 장관 헬무트 콜과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 베르됭에서 악수하는 사진이었죠.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스라엘 사람과 팔레스타인 사람이 한데 묻힌다면 둘은 악수할 수 있을까? 이후로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공연을 만들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방 묘지에서 “뤼시앙 블롱델*, 1859-1951”이라고 쓴 묘비를 보게 됐어요. 보불 전쟁을 세 번이나 겪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프루스트, 조이스, 피카소, 로댕, 스타니슬랍스키, 체호프, 자크 코포, 앙드레 앙투안이 이끈 예술계 혁명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모든 사상 흐름과 예술 형태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숲>을 쓰면서 물, 불, 대지라는 세 가지 요소를 토대로 한 삼부작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다시 오지 않을 과거,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뤼시앙 블롱델 : 무아와드는 이 인물을 <숲>에 등장시켰다. 탈영병으로 부상당한 채 우연히 숲에 흘러든다. 주인공 '루'가 가문의 비밀에 근접하기 위해 풀어야 할 첫 수수께끼가 뤼시앙의 정체였다.
그러면 작품의 순서가 “약속의 피(Le Sang des promesses)”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연결하는 요소인가요? WM 아니요. 지금에야 공연을 통해 작품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보게 됐습니다. 리바이벌 과정에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나란히 놓으면서 이 여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내 텍스트를 다시 들어 보니 특정 단어가 반복되더군요. “약속”입니다. 비록 작품에서 약속이 이행되지 않더라도 말이죠. 사람들은 <연안 지대>가 퀘벡 출신 주인공이 레바논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믿고 싶어 했지만 사실 작품엔 퀘벡이니 레바논이니 하는 구체적인 지명은 나타나지 않아요. <화염>은 레바논 내전을 염두에 두고 쓰면서 내 출신에 대한 연구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나를 조국에서 내몬 전쟁을 무어라 명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텍스트 어디에서도 ‘레바논’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죠. 이 연작을 아우르는 타이틀로 “약속”이란 단어가 즉시 떠올랐습니다. “어째서 약속이 오랜 시간 지켜지지 못했나” 그 이유를 추적해 가는 작품들이니까요.
<하늘>의 첫 대사는 “당신은 우리를 피에 익숙하게 만들었습니다”입니다. “당신”은 누구죠? WM <화염>과 <숲>에서는 많은 약속이 피로 이어집니다. 약속은 일종의 문입니다. 위험한 피에 이르기 위해선 이 문을 열어야 하죠. 내게 약속은 몸, 육체와 같은 것입니다. 살아 있고 생동하는 계약이지 특정 물건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화염>에서 “당신”은 약속을 해 놓고 그 약속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죽인 게 사랑(해야)하는 존재였단 걸 뒤늦게 깨닫죠. <하늘>에서 “당신”은 특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말은 특정인이 아니라 타자 일반을 향합니다. <하늘>에선 청년이 “당신”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어린아이는 “나” 또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요.
<연안 지대>는 다시 썼다고 했는데, <화염>이나 <숲>은 어땠나요? WM <연안 지대>는 젊은 배우가 연기해야 했습니다. 나는 마흔다섯이나 먹은 정치인이 스스로 젊다고 말하며 진짜 청년들을 무장 해제하려고 할 때 정말 당혹스럽습니다. 스무 살 청년은 누구의 목소리에도 휘둘리지 않는 전사입니다. 진짜 청년들을 감금하고 길들이기 위해 젊음을 무기로 사용하는 성인들에겐 분노를 느낍니다. 따라서 <하늘>은 40대 배우가 연기해야 했던 반면 <연안 지대>는 “진짜 젊은이”들이 연기해야 했어요. 작품을 다시 읽어 보니 전면 수정이 필요하더군요. <연안 지대>를 다시 읽으면서 내가 부사를 과하게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또 그간의 소설 작업을 통해 “기술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 법”도 배웠고요. 다시 써야만 했어요. 불필요한 부사와 중복되는 부분을 덜어냈습니다. <연안 지대>를 처음 쓸 때의 감각을 유지하면서 새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다시 쓰려고 했습니다.
<화염>은요? WM <화염>도 몇 군데 손보긴 했지만 피상적인 것들입니다. <연안 지대> 수정 작업과 비교할 수는 없죠. <연안 지대>는 덜어내야 할 부분을 표시하는 데만 거의 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테러가 자주 소재로 등장합니다. 당신의 연극은 정치 연극인가요? WM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테러를 묘사한 게 아닙니다. 희곡 언어를 통해 그런 오해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저는 분노, 행동, 헌신의 언어, 돌이킬 수 없는 동작을 원합니다. 그러려면 현실과 거리를 둔 언어, 시적인 언어를 창조해야만 합니다.
(이하는 다음 작품 <하늘>에 대한 내용 위주라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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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즈디 무아와드가 말하는 <숲> 창작 방식과 연출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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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의도
<숲>은 총 사부작 가운데 1997년 창작된 <연안 지대>, 2003년 창작된 <화염>에 이어지는 3편입니다. 네 작품이 서사적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상속”이라는 주제를 다루죠. “상속”이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물려받은 것과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 모두를 말합니다. 침묵 가운데 우리에게 전해져 우리를 찢고 우리를 파괴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어떤 음성, 무의식적 상속은 때로 너무 큰 고통을 수반합니다. 세대를 거듭해 상속이 이어지다 보면, 마침내 진실을 가린 막이 파괴되고, 침묵 속에서 뚜렷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누구도 막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땐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숲>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대사가 반복된다. 주인공들은 핏빛 비극, 그 중심으로 향해야만 하는 숙명적 순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창작 과정
<연안 지대>, <화염>과 마찬가지로 <숲>의 창작 과정은 중요합니다. 초기에는 캐릭터, 장면과 대화가 발전되어 가는 구체적인 시놉시스에서 출발합니다.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그들의 욕망, 소망, 의문에 부응해 캐릭터와 장면, 대화가 좀 더 분명히 형성됩니다. 그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작가 혼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이런 작업 방식이 무용가가 먼저 춤의 언어를 만들고 전체 퍼포먼스를 구상하는 과정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배우들과 매일 만나지 않고는 <숲>의 언어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런 과정은 <숲>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자아 물고기
저(무아와드)는 이런 창작 과정을 “르 푸아송 무아(자아 물고기)”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원칙은 의지를 통제하는 겁니다. 다가올 이야기를 미리 결정하지 못하도록. 다이빙에 비유할 수 있는데, 작가가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빠져들어 무의식의 어둠에서 새로운 아름다움(물고기)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물고기를 발견하면, 작가와 글쓰기 사이에 대화가 오갑니다. 그대로 둡니다. 둘 사이에 형이상삭적인 어떤 것들이 있다고 믿으면서요. 죽음, 고통, 사랑 같은 것들이죠. 글은 거기에 달리게 됩니다. 단어들이 바로 갖가지 기능의 메스들이에요. 그걸로 수술을 진행하죠. 작가의 미션은 “자아 물고기”를 거친 바다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해변으로 돌아가는 거죠.
작가가 수면 위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육지로 내보내는 시간이 옵니다. 바로 공연의 시간이죠. “자아 물고기”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한 채 모래 위에서 만조를 기다립니다. 관객들은 이 허약한 존재를 관찰합니다. 하지만 “자아 물고기”가 독을 품고 있을지 모르니 선뜻 만지진 못하죠. 만조가 찾아와 “자아 물고기”를 휩쓸어 갑니다. 밤이 내리고, 공연이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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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즈디 무아와드(Wajdi Mouawad, 1968~)
1968년 레바논 데이르 엘 카마르(Deir El Kamar)에서 태어났다. 내전으로 열 살 때 고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다. 1983년에는 영주권 문제로 다시 퀘벡으로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활동하던 중 프랑스어 선생님 권유로 캐나다 국립연극학교에 입학해 1991년 연기 전공으로 졸업한다. 1990년에는 배우 이자벨 르블랑과 첫 극단 ‘오 파를뢰르(Théâtre Ô Parleur)’를 창단해 운영했다(1990∼1999). 2000년에는 몬트리올 서푼짜리 극단(Théâtre de Quat’Sous) 예술 감독을 지낸다(2000∼2004). 2005년부터 프랑스에 정착해 활동 무대를 넓힌다. 아비뇽 연극제, 낭트 그랑 테(Grand T) 극장에서 활동했으며 현재는 파리 콜린국립극장을 이끌고 있다. 무아와드는 셰익스피어, 피란델로, 체호프 등 고전은 물론 <연안 지대>, <화염>, <숲>, <하늘> 등 직접 쓴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다. 매해 한두 작품을 제작할 만큼 활발히 활동 중이다. 희곡 외에도 ≪되찾은 얼굴≫, ≪심장 속의 포탄≫, ≪아니마≫ 등 소설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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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레터는? 헬렌 미렌이 알려 주는 “술 취한 연기 잘하는 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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