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바이오 템플릿을 활용해 완전히 만들어 낸 인물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인물을 재현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도 배우에겐 연기해야 할 “캐릭터”입니다.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때 그의 말과 행동, 즐겨 입었던 옷, 취미, 취향을 세세히 기록한 텍스트, 영상, 이미지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완전히 알 방법이 없죠. 연구가 필요합니다. 역사가가 아니라 배우의 태도로요!
엘리자베스 1세와 2세를 모두 연기한 왕실 인물 연기의 대가 헬렌 미렌의 전략을 들어 봅니다.
아카데미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헬렌 미렌에게 왕실 인물을 연기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그들의 감정 세계에 접근하는 겁니다. 이런 역할을 준비하기 위해 그녀는 왕실 인물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헬렌 미렌? 헬렌을 수식할 말은 많습니다.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자, 에미상 수상자, 토니상 수상자, 골든글로브 수상자. 한마디로 “우리 시대 최고의 배우”입니다. 명망 높은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에서 연기 훈련을 받았고, 피터 브룩의 실험극단과 함께 1년간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연극, 영화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헬렌은 역사적 인물을 맡아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와 엘리자베스 2세를 모두 연기한 유일한 배우죠. <더 퀸(The Queen)>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해 토니상을 받았고, 텔레비전 시리즈 <엘리자베스 1세>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해 첫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군주의 외적인 캐릭터에 대해서는 참고할 기록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 대해서는 알 길이 거의 없죠. 헬렌은 왕실 인물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자신만의 전략을 세웠습니다.
역사가가 아닌 배우 관점으로 역사를 읽으세요.
헬렌은 배우 입장에서 역사를 읽으라고 조언합니다. 캐릭터를 연구하면서 인물에 더 가까워질 겁니다. 다른 방식으로 이들의 심리에 접근해 보세요. 여러 소스로부터 다양한 기초 자료를 얻게 될 겁니다. 비디오 영상, 역사적 기록, 인물 사진 같은 것들요. 이런 것들은 몇 가지 예일 뿐입니다.
영상에서 캐릭터 행동의 가장 미세한 몸짓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세요. 순전히 정보 습득 차원입니다. 그걸 문자 그대로 참조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열심히 연구했다면 연기에 자연스레 그 결과가 반영될 겁니다.
인물 전체를 조사하세요.
실제 인물을 기초로 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그의 구체적인 생애를 연구해야 합니다.
헬렌이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했을 때처럼 이용할 수 있는 정보량이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인물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고, 더 창의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런 연구를 통해 캐릭터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캐릭터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요. 헬렌은 필 도너휴의 쇼에 출연한 아인 랜드(Ayn Rand)*를 보면서 그녀의 능력이 사고의 속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으로 그걸 표현했죠.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이후의 영국 왕실을 그린 영화 <더 퀸>(피터 모건 연출)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할 준비를 하던 중 헬렌은 비디오 영상을 하나 찾았습니다. 여왕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었죠. 그녀의 사생활을 짐작게 하는 자료였습니다. 어린 엘리자베스의 몸짓을 관찰한 건 헬렌이 그녀를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온전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왕 엘리자베스 윈저(Elizabeth Windsor)는 잠수함처럼 보였습니다.” 헬렌은 말합니다. “그녀는 잠수함처럼 물속을 이동하면서 잠망경을 통해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잠수함(엘리자베스) 안에는 이 모든 감정, 이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요. 하지만 물속에 잠겨 있었어요. 표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바라보는 눈만이 수면 위로 나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인 랜드(Ayn Rand, 1905~1982) : 러시아계 미국 소설가. 소설 《파운틴헤드》와 《아틀라스: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과 객관주의라는 철학적 시스템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연구 결과를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마세요.
심층 조사를 마친 뒤에는 그것이 순전히 정보용이므로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연구 결과가 뼈에 새겨져 있어야지 머릿속에 맴돌아선 안 됩니다. 헬렌은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조사를 통해 여왕이 어릴 때부터 청결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여왕이 토니 블레어 총리와 통화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성격적 특징이 드러납니다. 헬렌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만지고 스웨터로 안경을 닦고, 책상에 펜을 나열하는 등 약간 강박적인 몸짓으로 이 순간의 불안감을 전달합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계산한 이런 연기가 여왕의 인간적 측면을 드러냅니다.
캐릭터의 특징이 어디서 나오는지 찾으세요.
헬렌에게 엘리자베스 1세는 근엄한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여왕이 메리 스튜어트의 배신으로 스페인과의 전쟁 위기에 대처하는 핵심 장면에서 여왕은 군대를 모아 스페인 함대의 침략에 대비합니다.
헬렌은 많은 연구와 캐릭터 분석 끝에 엘리자베스를 권위를 벗고 지상에서 군대와 대화하는 인물로 재현합니다. 연설할 때는 적절한 제스처를 동반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런 장면 연출은 헬렌의 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엘리자베스가 연설하는 톤도 마찬가지로 헬렌의 결정이었고요. 헬렌은 이 순간 엘리자베스가 엄숙하게 보여선 안 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대신 엘리자베스가 군대에 활력을 불어넣길 바랐습니다.
시적 허용을 기억하세요.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한 헬렌의 경험처럼 캐릭터에 대해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적을수록 더 깊이 파고들고 더 창의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헬렌은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가 유용한 참고 자료라고 생각했습니다. 초상화를 연구하면서 헬렌은 자신 또한 여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한 명의 예술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어느 정도 해소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바로 이거야! 나는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거야.’” 헬렌은 말합니다. “‘이건 엘리자베스 1세 자체가 아니지, 이건 그녀에 대한 나의 예술적 해석이야.’ 이런 생각이 나를 해방시켰습니다.”
*시적 허용(Artistic license) : 시에선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문법에서 벗어난 표현이 쓰이기도 하는데, 이를 시적 허용 또는 시적 자유라고 한다. 여기서는 실존 인물이라고 해서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 하지 말고 예술적 해석을 가미해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