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헨리 5세>🤴 헨리 5세 Henry V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종환, 1600년 출판, 65% 발췌, 223쪽, 14800원
개요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왕 ‘헨리 5세’ 이야기를 재현했다.
줄거리 핼 왕자(헨리 5세)는 즉위 후 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현명하게 나라를 통치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방탕한 철부지로 기억하는 프랑스 황태자는 그를 도발해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이 시작되자 헨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동시에 적국에 대한 약탈을 금하는 이상적이고 공정한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등장인물남 남 36 / 여 4 / 그 외 많은 사람들
배경 나중에는 프랑스
공연 시간 2시간 30분 주제어 역사극 / 역사적 인물을 다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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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출판된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1377~1453), 특히 아쟁쿠르 전투(1415)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4세≫에서 폴스타프 무리와 어울려 다니며 비행이나 일삼던 철딱서니 왕자 핼을 ≪헨리 5세≫에서 위엄 있는 군주이자 영웅으로 등장시킵니다. 헨리 5세는 왕위에 오른 뒤 내내 프랑스와의 전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오랜 전쟁에 지친 민심과 군대를 달래기 위해 헨리는 이 전쟁이 잉글랜드 왕국을 위한 싸움이며 신의 뜻에 따른 성전임을 강조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를 앞두고 잉글랜드의 전세는 특히 불리했습니다. 이 무렵 잉글랜드군은 6000명에 불과했고 이에 맞선 프랑스군은 그 네 배가 넘는 2만 5000명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중장기병과 중장보병을 앞세우고 있었습니다. 전투 전날인 10월 24일 밤, 폭우까지 쏟아지자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헨리 5세는 병사들을 모아 놓고 빗속에서 잉글랜드의 영광을 위해 최후의 1인까지 당당하게 싸울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 연설이 바로 병사를 독려하는 왕의 연설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헨리 5세의 아쟁쿠르 출정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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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5세 우리가 전사한다면 조국의 손실이 우리로서 족하고 살아남는다면 군대가 적을수록 영광의 몫은 크오. 신께 맹세하지만, 한 명도 더 바라지 마시오. 맹세하지만, 난 황금에는 욕심이 없소. 누구든 내 돈으로 먹고 마셔도 전혀 개의치 않소. 사람들이 내 옷을 입어도 상관없소. 그런 외적인 것들에는 관심이 없소. 하지만 명예를 탐하는 것이 죄라면, 나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죄가 큰 사람이오. 그러니 제발 본국의 지원병을 바라지 마시오. 반드시 큰 명예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소. 한 명이라도 더 늘려서 내 몫을 줄이고 싶지 않소. 그러니 부탁이오. 단 한 명의 지원군도 바라지 마시오. 차라리 전군에 이렇게 알리시오. 진심으로 이 전투에 가담하기 싫은 자는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귀국 허가증을 발급해 주고 돌아갈 여비도 주겠다고 하시오. 우리와 함께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와 이 전투를 치르면서 함께 죽고 싶지는 않소. 오늘은 크리스피언 축제일이오. 오늘 살아서 무사히 고국에 돌아가는 자들은, 매년 크리스피언 축제 때마다 사람들 입에 그 이름이 오르내려 흥분될 거요. 늙어 이날을 맞게 되는 이들은 매년 그 전야제에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내일은 성 크리스피언 축제일”이라고 말할 거요. 그러고는 옷소매를 걷어붙여 상처 자국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할 거요. “이건 성 크리스피언 축제일에 입은 상처요”라고. 늙으면 사람들은 잘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건 다 잊을지라도, 이날 세웠던 공훈만은 반드시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때는 우리의 이름들이 평소에 쓰는 낯익은 말처럼 입에 오르게 되어, 헨리 왕, 베드포드, 엑서터, 워릭, 탈봇, 솔즈베리, 글로스터 등의 이름들이, 이웃 사람들과 주고받는 술잔 속에 생생히 되살아나게 될 것이오. 선한 아버지는 우리 얘기를 아들에게 가르칠 것이고 오늘부터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성 크리스피언 축제일이 올 때마다 우리 모두 이야기 속에 기억될 것이오. 우리는 소수, 행복한 소수이자 형제 군단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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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5세의 진심 어린 연설에 감동한 잉글랜드군은 밤새워 전투 준비를 마쳤습니다. 헨리 5세는 지형과 날씨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좁은 길목 750야드에 걸쳐 5000명의 장궁병들을 양 측면에, 중무장 기병 및 기사 1000명을 중앙에 배치했습니다. 최중앙에서 약 200명의 장궁병이 프랑스군을 유인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장궁병들이 양옆에서 수풀에 몸을 숨긴 채 프랑스군을 공격하자 이를 미처 피하지 못한 프랑스군의 전열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전날 내린 폭우로 길바닥은 진창이었습니다. 무기와 갑옷의 무게 때문에 프랑스군은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 틈을 타 잉글랜드군은 화살을 내려놓고 육박전에 가담했습니다. 전세는 역전되었고 잉글랜드군이 승리합니다. (≪중앙선데이≫, '헨리 5세 명연설, 아쟁쿠르 전투 대승 이끌다' 일부 참조)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잉글랜드군은 이어 칼레를 점령했고, 프랑스 북부는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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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로런스 올리비에의 ≪헨리 5세≫ 셰익스피어 작품 연기의 대가로 불리는 영국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Laurence K. Olivier, 1907-1989)가 영화를 연출하고 직접 헨리 5세를 연기했습니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런스 올리비에는 세익스피어 희곡들을 전문적으로 영화화한 감독으로도 유명한데 ≪헨리 5세≫(1944)로 아카데미 특별상을, ≪햄릿≫(1948)으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외에도 ≪리처드 3세≫(1955), ≪오셀로≫(1965) 등을 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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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5세≫(1944) 영화 포스터와 영화에서 헨리 5세를 연기하는 로런스 올리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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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케네스 브래너의 ≪헨리 5세≫
영국 출신의 유명 연극 배우 케네스 브래너는 서른둘에 영화 ≪헨리 5세≫에서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아 특출한 재능을 자랑했습니다. 케네스 브래너는 감독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5개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작품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대가 거셌다고 합니다. 1980년대에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영화로 만드는 것 자체가 여러 면에서 모험이었던 데다가 그의 영화 연출 경력이 전무했기 때문이지요.
케네스 브래너는 연극 배우의 경험을 살려 영화 ≪헨리 5세≫를 연극적으로 연출했습니다. 대사 하나하나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랐습니다. 자칫 무겁고 지루할 뻔했던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건 패트릭 도일(Patrick Doyle)의 음악입니다. 아쟁쿠르 전투 직후 "논 노비스 도미네(Non nobis, Domine, 주께 영광을 돌리세)"가 흘러나오는 후반부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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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브래너의 영화 ≪헨리 5세≫(1989) 포스터와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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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영화 <헨리 5세> 중 'Non nobis, Dom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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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 아이콘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헨리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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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더 킹: 헨리 5세(The King)’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할리우드 스타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헨리 5세 역을 맡아 방황을 끝내고 왕관의 무게를 감내하는 청년의 혼돈을 연기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아쟁쿠르 전투 장면과 헨리 5세의 출정사가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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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쿠르 전투를 승리로 이끈 헨리 5세의 출정사는 공식 문건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 연설 장면을 통해 유명해졌죠. 오늘날 헨리 5세가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겹비한 군주로 영국인들에게 각인된 데는 셰익스피어의 공이 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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