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더 나은 배리어프리 공연을 위한 대안은? 수어 통역 공연(이하 SLIP)에서 청각 장애인 관객의 접근성이 제한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객은 미적 공간에서 배우들이 제시하는 시각 정보와 별도 공간에서 통역사가 제시하는 청각 정보를 조합해 연극의 의미를 구성해야 한다. 모든 응답자가 이것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난 계속해서 놓쳤어요. (...) 그들의 이야기를 나는 계속해서 놓쳤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공연에서 절반, 통역에서 절반을 가지고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야 했어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게 분명한 것도 아니고요.” 한 보고서에 따르면, SLIP에서 청각 장애인 관객의 35%만이 공연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응답했다.
청각 장애인 관객이 배우와 통역사가 전해 주는 의미들을 조립해 공연과 의미 있는 상호 작용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감안하면 SLIP가 청각 장애인 관객의 극장 접근성을 제고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슬프게도 청각 장애인 관객 역시 이를 알고 있다. 데이터에 따르면 청각 장애인 관객은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거나, (연극을 보기 위해) 고도의 준비를 수행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극장에 가는 것을 선호한다. 반면 비장애인 관객은 상대적으로 준비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며, 연극을 보면서 필요한 모든 의미를 구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
|
|
성공을 위한 노력 청각 장애인 관객의 낮은 관람 비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에 효과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의 원인을 비장애인 관객 편의만이 고려된 극장 건물을 포함해 비장애인 커뮤니티로부터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의 역사적 분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SLIP 자체가 잘못되었을지 모른다. 통역사를 통한 접근성 제고의 노력은 창작이 아니라 행정적 과정에 속한다고 보는 가정이 일반적이다. 전략적인 예산 편성이 현상 유지라는 실정을 뒷받침한다. 최소한의 비장애인 극장 전문가들에게 접근성이 좋다는 느낌을 주는 게 상대적으로 더 경제적이다.
SLIP가 공연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엄격하게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은 고유한 의사소통 문제를 고려하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하나의 언어를 구사하는 연극 스태프는 통역사가 번역한 언어를 효과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통역 지원(혹은 그에 따른 비용) 없이 청각 장애인 관객과 소통하는 것조차 어렵다. 게다가 SLIP 제작의 일반적인 과정에서는 극장 직원이 통역사와 극단 사이의 중개자가 되므로, 접근성 높은 공연을 만들어야 할 임무를 띤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이고 의미 있는 상호작용은 제한된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무대 위 소통 실패에 대한 솔직한 토론을 방해하는 것은 무대 바깥에서의 부적절한 소통인 것 같다. 이런 논의 자체가 없다면 SLIP의 결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것이 없다면 진정한 접근성 제고를 위한 고민의 동기조차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 연구의 응답자들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제안한다. 1) 현재 모델의 통합, 2) 현재 모델의 개선, 3) 더 나은 새로운 모델로 대체.
1)을 위해서는 극장 통역 분야를 새롭게 전문화해야 한다. (의료계나 법률계에는 전문 훈련을 받은 통역사가 있다.) 한 응답자는 “연극을 위한 통역은 별개다. 표준적인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연극 통역사는 뭔가 달라야 한다”고 답했다.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라면 공연의 음색을 능숙하게 시각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수어를 창의적으로 표현하면서 공연 안에서 통역사 스스로 배우로 간주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런 수준의 전문성은 연극 제작 과정에서 배제되어 일하는 통역사로는 달성하기 어렵다. 극장에서 일하려는 통역사에게 제공되는 전문 교육은 아쉽지만 거의 없다. 제작자가 공연을 준비할 때 통역사를 배우, 감독과 함께 작업하도록 권장한다면 SLIP에 대한 통역사 교육 및 후속 준비를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통역사는 리허설에 참석하지 않으며, 보통은 회의에만 참석한다. 기존의 SLIP 제작 과정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배우/통역사와 관객 간 온전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 배우의 연기와 통역사의 통역의 물리적 분리를 제도적으로 유지한다.
(↓2020년 서울문화재단에서는 공연예술분야 수어통역전문가 교육과정을 개설해 수강생을 모집했다.) |
|
|
2) 현재 모델은 배우와 통역자 간 공간 분리를 없앰으로써 개선할 수 있다. 통역사는 배우의 공간 안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림자 통역 같은 기술은 이미 청각 장애인 및 비장애인 관객에게 접근성을 제공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통역사가 배우와 근접해 있으면서 배우와 동작, 의상 등을 일치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더 도전적이고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하므로 영국에서 상용되진 못한다. 그러나 더 간단하고 저렴한 방식으로는 청각 장애인 관객을 연극에 동참시키기가 어렵다. 정작 청각 장애인 응답자는 통역사와 배우의 움직임까지 긴밀히 통합되는 게 바람직하긴 해도 필수는 아니라고 말한다. 통역사가 배우의 공간 바로 안쪽에 있으면서 무대 위에서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청각 장애 관객이 무대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대의 주요 공간에 통역사를 배치하면 비장애인 관객의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비장애인 응답자는 이 문제를 인형극에 비유했다. “인형술사가 있다는 걸 잊고... 그저 인형에만 집중할 뿐이에요.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배우의 그림자 역할을 수행한다 해도 배우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관객은 보기로 한 것만 본다. 무대 위 통역사가 의미를 구성하는 데 꼭 필요하지 않다면 우리는 통역사에게 관심을 끌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극장 전문 통역사를 양성하고 통역사를 공연 제작 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을 제안했다. 둘 다 예산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청각 장애인 응답자 중 한 명은 “왜 거의 모든 공연이 통역되고 있는 겁니까? 모든 공연을 다 볼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3개월 동안 5개 극장에서 19편의 작품이 수어로 통역되었습니다. 티켓을 다 사려면 복권에 당첨되어야 할 겁니다.” 제작자가 좀 더 전략적인 차원에서 청각 장애인 관객이 볼 만한 작품들을 골라 통역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좀 더 시각적인 작품이라면 접근하기가 쉽다. “마임, 움직임, 유머가 있는 간단한 대사를 보는 걸 좋아합니다.” 대화가 많은 공연은 인기가 없다. 통역사에 의해서만 의미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공연 내내 통역사만 보고 있어야 해요.... 공연이 끝나면 공연에서 뭘 봤는지도 알 수 없죠.” 선택적인 접근을 통해 절약된 예산을 SLIP 공연의 효과 개선에 투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3) 현재 모델을 새로운 모델로 대체해야 한다면 더 많은 청각 장애인 배우들을 기용해 청각 장애인 관객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일반적인 공연에 청각 장애인 배우를 기용하고, 작품이 얼마나 시각적으로 변하는지 보세요. 와우!” 현재 SLIP는 구어 중심의 극을 수어로 번역하는 것으로만 간주된다. 주류 극장에서 비장애인 관객을 위해 청각 장애인 연극을 통역하는 일은 드물다. 비장애인 관객이 자신의 경험적인 요소가 반영된 작품을 보고 싶어 하듯이, 주류 극장 공연에 청각 장애인의 경험적 요소가 표현된다면 청각 장애인 관객의 관람률도 올라갈 것이다. 관건은 비장애인 관객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청각 장애인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청각 장애인만 관람할 수 있는 연극은 객석을 대부분 청각 장애인 관객으로 채워야 할 것이므로 경제적으로 보면 실현 가능성이 낮다.
(중략)
하지만 이런 개선안을 적용하기 위해선 통역사의 전문화, 창작 과정에서 청각 장애인 배우의 기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불행히도 이는 제작자의 상당한 태도 변화 이후에야 가능하다. 이 연구에 참여한 한 통역자는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감독은) 당신이 무대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예술적 효과를 떨어뜨릴 겁니다.” 다른 응답자는 배우가 통역사에게 욕을 퍼부었다고 했다. 극장 경영진 중 한 명은 “대부분의 순회 극단의 경우, 통역사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아마도 가장 후순위일 것이다.” 통역사가 SLIP에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한다면, “수어 공연은 중단될 겁니다. 극단에서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몇은 수어 통역사가 무대 위에 서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아마 내가 ‘좀 더 많은 게 필요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니요’라고 할 겁니다”.
(↓<로드킬 인 더 씨어터>(구자혜 작/연출, 2021)는 국립극단 최초 전 회차 배리어프리 공연이었다.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수어 통역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더불어 음성 해설, 한글 자막이 제공되었다.)
|
|
|
SLIP는 연극 전반에 비쳐 보면 분명히 특징적이다. 하지만 청각 장애인 관객의 관람률은 여전히 낮다. 이 연구는 통역사가 지정된 위치에서 수어 통역하는 현재의 방식이 청각 장애인 관객과 공연의 효과적인 상호작용에 기여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청각 장애인 관객에게 적절한 접근성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통역사가 무대 공간에서 분리됨으로써 온전한 의미 전달에 문제가 생기고, 공연에서 통역사가 배우로 개념화되지 못하며, 효과적인 수어 번역이 어려워진다. 이런 결함에 대한 연구는 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수어 통역이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공연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연극 제작자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SLIP는 ‘포괄적 의제(inclusion agenda)’에 너무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이 사상적 입장을 먼저 재정비하지 않고는 극단 우선순위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통역은 접근성, 다양성 의제에서 단지 상징적인 성취일 뿐이다.
개선은 가능하다. 통역사의 전문화, 퍼포머로서의 통합, 무대에서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 장애인 배우의 폭넓은 기용을 통해 연극은 비장애인 관객 위주의 무대 예술이라는 현재 위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 더 포괄적인 의사소통 행위가 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에는 관료적 자세에서 벗어난 접근성 제고에 대한 책임감이 필요하다. 청각 장애인 배우 또는 통역사를 공연 창작 과정에 참여시키고 제작진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게 한 다음 수어를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산 지원 기관, 연극 제작자, 극장에서 운영하는 현재 방식의 SLIP이 청각 장애인 관객의 접근성을 제고하는 데 실패했다는 데 대한 대중의 공감이 있어야 한다. 접근성이라는 이념에 대한 현재 수준의 아이디어에 도전해야만 SLIP 수용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접근성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기술을 개발할 여지가 생길 것이다. |
|
|
- 저자 마이클 리처드슨(Michael Richardson)에 대해.
|
|
|
에든버러 헤리엇와트대학교 박사과정 수료자다. 청각장애인이 배우, 관객으로서 연극에 참여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공연, 농인 문화, (수어) 통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전에는 주로 청소년 연극, 응용 드라마 연출로 일했으며, 청각장애인 학생들의 의사소통을 지원하는 일도 했다.
Michael Richardson
Theatre Topics, Volume 28, Number 1, March 2018, pp. 63-74 (Article)
Published by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다음 레터에서 SLIP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
|
|
2018년 영국에서 발표된 이 글이 2022년 한국 극장 상황에 얼마나 유효할까 고민했습니다. 한국에서 배리어프리 공연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크고, 많은 분들이 더 나은 배리어프리 공연 제작을 위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으로 충분한가 하는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공연 예술 분야에 특화된 전문 수어 통역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혹시 이 글이 좀 더 창의적인 배리어프리 공연 기획과 제작에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번 레터를 준비했습니다. 다양한 의견, 제안 보내 주세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