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수어 통역 공연(SLIP)은 배리어프리에 실패한다!
- 수어 통역 공연, 청각장애인을 위한 최선일까?
|
서론
수어 통역 공연(SLIP, 이하 SLIP로 표기한다)이란 극장에서 한 명의 통역사가 음성 언어를 수어로 전달하는(자막이나 그 비슷한 다른 수단이 아니라) 공연을 말한다.(Gebron; Rocks 2015) 초기에는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의 요청으로 추진되었으나 오늘날 SLIP에 대한 수요는 관객 개발 및 접근성 확대라는 요구에 더 부합하고 있으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영국에서 SLIP 제작에 투자되고 있다.(Simpson) 그럼에도 청각장애인 관객 수는 예상보다 적으며, 청각장애를 가진 연극 창작자들은 SLIP가 진정한 접근성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Conley) SLIP의 관객 및 극장 관리자와 함께 수행된 나의 현장 연구는 SLIP가 청각장애 관객에게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최신의 여러 연구들과도 부합한다. SLIP는 분명 세 가지 수준에서 실패했다. ① 무대에서 통역사를 퍼포머로서 개념화하지 못한다. ② 의미 있는 번역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나는 공연에서 절반, 통역에서 절반을 가지고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야 했어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게 분명한 것도 아니고요.” 모든 청각장애인 응답자가 각기 다른 표현으로 이와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이는 ③ 관객의 연극 이해도가 공연을 전달하는 방식에 의해 손상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연극을 ‘무대 예술’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이벤트’로 간주한다면, SLIP이 청각장애인 관객의 참여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방해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물론 모든 데이터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기존의 모델을 취합하거나 개선하거나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현재의 SLIP가 청각장애인 관객에게 접근성을 제공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SlIP는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에서 대부분 포기한 실패한 기술이다. 그러나 현상 유지에만 전념하고 있는 연극 제작자들이 SLIP가 실패한 기술임을 인정하고 보다 창의적인 차원에서 재정적 투자를 고려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춘다면, 진정한 의미의 접근성 제고 방법을 개발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로부터 청각장애인 관객의 공연 참여도 가능해진다.
연구에 임하며.
나는 오페라, 뮤지컬, 그리고 무엇보다 청소년 연극(Richardson 2015)에서 감독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연출가다. 10여 년 전 청소년 예술 단체를 운영하면서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와 함께 일했는데, 이 단체는 리허설에 청각장애 청소년, 공연에 성인 청각장애인을 데려왔다. 처음에는 이들이 공연을 볼 수 있도록 관례에 따라 SLIP을 사용했는데, 나는 이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무대 위에 통역사를 두는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Sondheim의 Sweeney Todd( 스위니 토드*)를 제작할 때였다.] 두 명의 배우들가 주연 캐릭터를 연기하게 했다. 한 명은 수어를 했고, 한 명은 노래를 했다. 또 코러스의 안무를 수어로 교체했다. 최근의 연구는 청각장애인의 연극 참여에 대한 고민이 비장애인으로서 내 관점에서 수행되었다는 이때의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나는 청각장애인과 극단에서 함께 일하지는 않았지만,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와 교류하기 위해 다른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영국 수어(BSL)를 배우고 내가 사는 지역의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에서 그들과 우정을 쌓았으며, (연극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일했다. 덕분에 이 연구를 위해 청각장애인 참가자를 모집하고 통역사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그들과 함께 그들의 언어로 데이터를 생성하고 그 데이터를 영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별다른 언급이 없다면 이 글에 제시된 모든 인용문은 청각장애인 참가자가 BSL(영국 수어)로 응답한 것을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
청각장애인 커뮤니티 내 아마추어 및 전문 공연의 풍부한 역사는 청각장애인의 참여를 장려하려는 주류 극장에서도 대개 무시되어 왔다. 대신 1980년대 BSL(영국 수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영국에서 개발된 기술인 SLIP(수어 통역 공연)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BSL가 처음 언어로 공식 확인된 게 1975년이다.) 이전에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산발적으로 SLIP가 시도된 적이 있었지만 패러다임에 전환을 보인 것은 1981년이었다.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 The Mousetrap*>이 수어로 통역된 게 시작이었다. 같은 해 말 미국에서의 흥행에 힘입어 마크 메더프의 <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이 영국 투어에 나섰다. 공연은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수많은 청각장애인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수어 통역사들이 대사를 BSL로 동시통역했다. 런던의 국립극단과 영국 국립 오페라 극단은 1990년에 첫 SLIP 공연을 제작했다.(Touche Ross) 곧 런던 웨스트엔드와 지역의 여러 극단도 뒤따라 SLIP 공연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전형적인 극장 통역 모델을 찾아볼 수 있는 건 순회 극단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극장에서, 극단이 머무는 일주일간이다. 지역의 수어 통역사가 공연 며칠 전에 처음 보는 작품을 통역하기 위해 고용된다. 리허설은 거의 또는 전혀 없으며, 제작진은 통역사를 공연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고, 제작이 확정된 뒤에야 극장 관리(행정) 직원에 의해 추가된다(Turner and Pollitt). 공연 기간에 통역사는 강당 바닥이나 무대 아래 구석에 배치된다. Julie Gebron은 1966년 연극 통역 핸드북에서 이를 "플랫폼 통역"이라고 불렀다.
이때 연극 통역사는 보통 “회의” 통역 모델(Pochhacker)을 택한다. 이는 겉보기엔 회의와 유사하다. 통역사는 무대 옆에 배치된다. 커뮤니케이션은 일방향이다. 배우가 대사를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해당 대사의 통역이 이루어진다. 자세히 분석하면 (배우가 표현하는 대사와 통역사에 의해 번역된 대사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의 통역사는 원텍스트의 의미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현하는 단어 대 단어 번역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극장에서는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멀티태스킹"(Edgar 156)이 필요하다. 간단한 단어 대 단어 번역은 서브 텍스트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무시할 위험이 있다. 또한 통역사에겐 청중에게 의미를 전달할 때 중립을 지키도록 요구된다.(Tate and Turner) 이는 "통역사가 개인적 참여를 극도로 배제하는 것"(Roy 348) 등의 결과로 나타난다. [또는 통역사의 "투명성"(Angelelli)] 이것은 극적인 텍스트의 다층적인 의미를 전달해야 하고 신체 움직임을 동원해 관객과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고 보는 배우의 기본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Fischer-Lichte) |
접근성이라는 개념에는 다양한 관객을 공연에 참여시키기 위한 여러 노력이 포함된다. SLIP 외에도 접근성 제고를 위한 노력에는 자막, 편안한 공연, 터치 투어 및 오디오 설명(Fletcher-Watson) 등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기본적으로 극장이라는 건축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물리적 장벽을 제거하려는 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관객 참여라는 조건이 필수적이기 때문에(Bennett) 청각 장애인 관객에게 배우-관객의 의미 있는 상호작용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질 때만 SLIP가 접근성을 제공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특히 청각 장애인 관객이 시각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Bahan) 고려하면, 그러한 상호작용은 반드시 수어라는 시각적 채널을 통해 극적 텍스트(Elam)가 완전하게 표현됨으로써 의미를 구성한 결과로 가능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효율성은 완전한(또는 적어도 적절한) 이해와 참여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비장애인 관객과 비교해 청각 장애인 관객의 참여가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나마 객관적인 평가 방법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이 연구는 SLIP가 효과적인 참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접근성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음을 시사한다.
1) 극장 공간 활용 실패 무대는 배우뿐만 아니라 의상, 배경, 소품, 조명 등으로 구성되는 다층적인 의미 체계다. 음성 텍스트와 결합하면 이들의 “동시적인 정보”를 통해 비장애인 관객은 의미를 구성하고 배우와 상호작용하면서 공연에 참여한다. 하지만 청각 장애인 관객은 음성 텍스트를 별도의 공간에서 수어 번역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청각 장애인 관객은 무대 위 배우를 봐야 할지, 통역사를 봐야 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에 집중한다면 다른 한쪽과의 상호작용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의미를 구성하는 두 축 중 하나가 무너진다. 한 응답자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어 통역이 오른쪽으로 너무 쏠려 있어 (무대 위 배우가 전달하는 의미들을) 많은 것을 놓쳤습니다.”
수어 통역사를 무대에서 분리하는 이유는 배우와 비장애인 관객에게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는 의심스럽다. 혹자는 무대에 통역사가 위치한다면 비장애인 관객의 주의가 산만해질 거라고 하지만, 이에 대해 비장애인 관객은 복합적인 견해를 보여 준다.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면 내 눈이 그 동작으로 향했다”,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배우들의 경우엔, 스태프들이 제공한 데이터에 따르면, 통역사를 별도 공간에 배치하는 게 오히려 주의를 흩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확실히 배우의 연기는 수어 통역사의 존재로 인해 복잡해진다. 통역사가 자기 자리를 지키더라도 관객의 주의를 끌려 할 것이므로 이는 통역사와 배우의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
2) 수어 통역사를 퍼포머로 개념화하는 데 실패
청각 장애인 응답자는 SLIP에서 통역사가 “더 많은 보디 랭귀지”와 “더 다양한 표정, 움직임, 마임”을 통해 연극의 의미를 보다 온전히 전달하길 원한다. 그들은 통역사가 능숙한 배우가 되어 주길 원한다. 통역사가 통역사-관객 간 강력한 상호작용을 만들어 내어 공연의 원천이 되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관객은 수어 사용으로 신체적 의사소통 가능성이 축소되는 연출에 익숙하다. 통역사는 보디 랭귀지와 표정을 풍부하게 사용해 대사의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앞서 말한 대로 회의 스타일의 통역에 의존한다. 이는 청각 장애인 관객의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손상시킨다.
통역사를 제작 과정에서 배우들과 분리함으로써 이런 문제는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청각 장애인 응답자는 훌륭한 연기를 통해 무대 위 행동, 신체적 언어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통역사를 선호한다. 그러나 여러 극장에서 그들은 “한두 사람은 매우 훌륭한 통역사이지만 균형을 따지자면 어떤 건 성공이었고 어떤 건 실패”였던 경험을 하게 된다. 실제로는 한 명의 통역사가 여러 캐릭터의 대사를 표현할 것이다. 또 어떤 공연에서 누가 통역을 맡을지는 통역사의 스케줄에 따라 결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게다가 통역사가 연기를 수행한다면 더 온전하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선 통역사도 배우와 같은 의상을 착용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통역사는 “검은색 옷을 입는다”. 한 극장 관리자는 숙련된 수어 통역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극장에 수어 통역사를 기용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수어 통역사에게 배우와 같은 의상이 제공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략)
3) 성공적인 번역 만들기에 실패
배우와 달리 수어 통역사는 음성 언어를 수어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시, 유머(특히 말장난), 노래와 같은 텍스트의 문학적 기능 때문에 매우 복잡한 작업이다. 한 비장애인 응답자는 수어 연극 시스템에서 청각 정보를 수어로 대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다른 층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내 생각엔 음악이 쇼에서 큰 부분이었어요... 음악 자체가 이야기를 말해 준다고 생각했어요.”. “악센트가 모두 다릅니다.” “음향 효과 역시 큰 영향을 미치죠.”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언어로서뿐만 아니라 양식적으로도 대체되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감안할 때 출발어와 도착어를 완전히 일치시킨 번역은 어렵다. 연극 텍스트에서 모든 청각적 구성 요소를 시각적으로 조화시켜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SLIP에서 청각 장애인 관객과의 접근성이 번역 때문에 더욱 제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 저자 마이클 리처드슨(Michael Richardson)에 대해.
|
에든버러 헤리엇와트대학교 박사과정 수료자다. 청각장애인이 배우, 관객으로서 연극에 참여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공연, 농인 문화, (수어) 통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전에는 주로 청소년 연극, 응용 드라마 연출로 일했으며, 청각장애인 학생들의 의사소통을 지원하는 일도 했다.
Michael Richardson
Theatre Topics, Volume 28, Number 1, March 2018, pp. 63-74 (Article)
Published by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다음 레터에서 SLIP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
2018년 영국에서 발표된 이 글이 2022년 한국 극장 상황에 얼마나 유효할까 고민했습니다. 한국에서 배리어프리 공연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크고, 많은 분들이 더 나은 배리어프리 공연 제작을 위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으로 충분한가 하는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공연 예술 분야에 특화된 전문 수어 통역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혹시 이 글이 좀 더 창의적인 배리어프리 공연 기획과 제작에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번 레터를 준비했습니다. 다양한 의견, 제안 보내 주세요.🦄 |
|